"'쟤네는 뭐야?' 요즘은 대학무대에 서면..."

[인터뷰] 9 년만에 신보 발매하고 콘서트 준비... 민정연 '꽃다지' 대표

등록 2010.07.19 11:38수정 2010.07.1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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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의 대표이자 기획자이자 유일한 실무자이면서 자금마련책이기도 한 민정연 대표(그러나 나는 '디첼라'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디첼라는 '길'을 뜻하는 아프리카 말이다)를 알게 된 것은 2007년 여름 '지리산 십자매'를 결성하면서부터였다.

친한 페미니스트 블로거들끼리 고정희의 산인 지리산을 가기로 하면서 그 친구의 친구, 다시 그 친구가 붙어 무려 열 명의 페미니스트가 지리산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개중에는 등반에 일가견이 있는 축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동네 앞산도 한번 오르지 않는 비루한 축도 있었다. 그는 전자였고 나는 물론, 후자였다.


슥슥 앞서 가버리면 될 텐데도 페미니스트들은 또 어찌 아름다우신지, 오히려 등반에 익숙한 이들이 행렬의 꼬리를 지키며 게걸음을 치는 우리를 격려하며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때의 따뜻함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리산 십자매 이후로는 처음 마주하는 것인데도 늘 만나오던 것처럼 익숙하다.

민중가요를 하려는데... 노래를 너무 못 해서...

 14년차 꽃다지 소속 문화노동자 민정연 대표
14년차 꽃다지 소속 문화노동자 민정연 대표송민성
- 못 알아볼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웃음).
"그러게 나도 좀 걱정했는데 딱 알아보겠더라."

- 지리산 가서도 엄청 수다를 떨었는데 왜 디첼라가 꽃다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 몰랐을까?
"워낙에 우리가 나이는 몇 살인지, 직장은 어디 다니는지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

- 하긴 그래. 그거 말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잖아(웃음). 그럼 그때도 꽃다지에서 활동했던 거지?
"1997년 꽃다지에 합류했으니까 햇수로 14년 차야. 내가 서른두 살 나이에 늦깎이로 꽃다지 기획팀으로 들어왔거든. 그때는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더 후질 때라서 서른둘이면 뭔가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어. 기획팀 막내로 들어왔더니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 딱 한 명 있고 나머지 다 20대더라고. 주변에서는 왜 끝물에 운동권 들어가냐고 말리는 사람도 적잖았지."


- 그럼 그 전엔 무얼 했던 거야?
"사교육 시장의 일원이었어(웃음). 나는 대학 때 운동권도 아니었어. 대학 딱 들어가니까 선전물이라고 주는 데 너무 조악한 거야. 등사기로 밀어서 찍은 건데 글씨를 알아볼 수도 없어. 아니, 알아볼 수도 없는 걸 왜 주는 거야? 이러면서도 참고 좀 읽어봤는데 언어는 또 왜 그리 투박한지.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답을 일찌감치 내렸지.

그러다 85년 5월 대동제 때 광주 사진전을 보았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충격이나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경지의 감정들이 생기더라구. 그 무렵 나는 남파간첩들이 우리 군복을 입고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고, 시민군에도 위장간첩이 있어서 선동을 하고 있다는 류의 이야기를 철석 같이 믿고 있었거든. 내가 그렇게 오해하고 외면하는 동안 이렇게 짓밟힌 사람들이 있구나,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너무 컸어."


- 그렇게 이쪽으로?(웃음)
"바로 오진 않고(웃음). 대학 4년 동안은 공부만 열심히 했어.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돈도 벌어야 했고. 학원 한 5, 6년쯤 다니고 나니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더라. 그때 나는 뭘 원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떤지 좀더 충실히 직시했지. 무엇보다 80년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점점 커져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어.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문화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95년부터 기획자 강의를 듣기 시작했지."

- 이렇게 들으면 굉장히 간단하지만 적잖은 모색과 고민이 있었을 듯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던 건지?
"거창한 무언가가 있었다기보다는 가끔 집회에 나가면 벌벌 떨릴 때마다 같이 부르던 민중가요가 엄청 힘이 되었던 기억들이 크게 작용했지. 민중가요는 내게 나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했던 기억들인 거지. 한 2년을 고민하다 결국 노래가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 내 체험 속에서 나온 확신이니까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

민중가요 판으로 들어가자고 결론은 내렸는데 내가 노래를 너무 못 하는 거야. 그래도 노래패에 가려면 뒤풀이에서 한 곡 정도는 뽑을 실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었어(웃음). 내가 진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음치에 박치거든.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고등학교 때 가창 시험을 보면 그렇게 엉망으로 노래를 부르면서도 잘하고 싶은 욕심에 "다시 할게요"를 한 몇번 반복하다 결국 노력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좋은 점수를 받고 내려가곤 했어(웃음)."

- 그래서 기획자의 길로 접어들었구나(웃음). 그렇다면 여러 민중가요패 중에 굳이 꽃다지를 선택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거야?
"민중가요 판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하고는 민중가요 음반을 다 구해서 들어봤어. 그 중에 꽃다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해오면서 끊임없이 변신하려는 노력이 느껴졌어. 물론 다른 노래패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나랑 가장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거야.

그러던 차에 97년 3월에 꽃다지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 지원했지. 한겨레 생활광고였는데 '꽃다지 식구를 찾습니다' 뭐 이렇게. 어찌나 촌스러운지 눈에 확 띄더라구(웃음). 어머, 식구를 찾는대... 킥킥거리며 지원을 했지."

기획자만 9명... 아이돌 못지 않았던 90년대의 꽃다지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을 토닥여주고 위로해주는 음악도 필요하지 않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을 토닥여주고 위로해주는 음악도 필요하지 않나"송민성

- 97년의 꽃다지는 어땠어?
"그땐 규모가 굉장했지. 기획팀만 9명이었으니까. 거기에 가수와 연주자들까지 합치면 23명이었어. 이번에 자료 정리하면서 20년 전 사진들을 죽 보는데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도 밴드가 다 같이 갔더라구. 정 어려우면 건반 하나 기타 하나 가져가더라도. 라이브 공연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거지.

그때는 몰랐지만 돌아보면 그때가 전성기였던 것 같아. 연간 200회 공연을 하던 때니까. 요즘 '아이돌' 못지 않았지. 보통 때 서너 군데, 많을 때는 대여섯 군데도 갔으니까. 아이돌들은 좋은 차나 끌고 다니지, 우리는 연기 뿔뿔 나는 봉고차를 타고 다니다 차 퍼지기 일쑤고. 그럼 내려서 지하철 타고 다녀야 되고. 그러다 더위 먹어서 MR 가방 같은 거 잃어 버리고(웃음).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게 정말 쉽지가 않아. 짐도 많고 개런티도 비싸지고 바리바리 싸들고 가도 음향이 안 받쳐주고. 그러다 보니 연주자들의 고민이 커졌지. 세 번 공연을 하면 한 번 정도 나가니까 아무래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잖아. 아티스트로서 단절된 느낌이 컸던 거지. 내가 들어가던 무렵도 문화운동으로서 활동영역을 넓혀보자는 차원에서 기획팀을 대거 뽑았던 건데 바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난관에 부딪혔지.

그래서 99년에 조발위라고 조직 발전을 위한 논의를 1년 반 정도 했어. 공연도 다 취소하고, 앞으로의 활동 지향이나 방식 등에 굉장히 구체적으로 논의를 했지. 어떤 대중을 만날 거냐, 그들은 어떤 세대냐 어떤 노래를 할 거냐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또 그런 게 엄청난 이슈여서 열나게 토론을 했었지. 다들 기운이 넘쳐날 때기도 하고(웃음).

그 과정을 통해 연주자들, 기획팀 대부분이 정리를 했어. 어떻게 되든 이 안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자신 있는 사람들만 남자고 해서 연주자 2명, 가수 5명, 기획자 2명 이렇게 남았어. 그러고는 1년간 절치부심하는 시간을 보냈지."

 일본 메이데이 투쟁에 참가한 민정연 대표(가운데)
일본 메이데이 투쟁에 참가한 민정연 대표(가운데)꽃다지

- 그 시간 동안엔 어떤 고민들을 했던 거야?
"우리는 이제 어떤 노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설 거냐였지. 민중가요가 낙후되어 있는 장르임에 틀림없어. 내가 처음 민중가요를 접한 게 어느 집회 판이었는데 사람들이 <바위처럼>을 부르면서 막 춤을 추잖아. 그런데 그게 멋있거나 재미있어 보이지 않고, 뭐야? 이러면서 거리감이 확 느껴지더라구. 왜 부흥회 같은 걸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거리감 느끼는 것처럼. 운동은 관심 없는 사람들을 이쪽으로 끌어당기는 건데 이건 아니다 싶었지. 민중들과 함께 노래하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형식을 바꿔보기 위해 지금 음악감독으로 있는 정윤경을 영입하고 다양한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어."

- 다양한 시도들이라면 어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잖아, 분위기도 바뀌고. 이걸 실감했던 경험이 하나 있어. 내가 민주노총 천막농성장에 가서 화장실을 들렀는데 거기 온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누를 사다 놔야겠다고 하는 거야. 자신들이 만날 와서 쓰니까 비누 하나 사다 놓아야 겠다며 자기들끼리 그런 얘기를 나누는 거야.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내겐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어.

천막농성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또 그걸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애초부터 노동 운동하겠다고 작심하고 노동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거든.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내 목에 칼이 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투쟁가가 된 노동자들이 많거든. 자기들도 힘든데 그 와중에 민주노총 사무실 살림 걱정을 하는 거야.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노동자들이 바뀌고 있는 거지. 이랜드 노조 투쟁(2006년 6월 이랜드그룹의 외주화에 따른 집단해고에 항의하며 당시 홈에버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을 지켜보면서도 그걸 느꼈는데 보통 점거투쟁하다 끌려나가면 악다구니치고 욕하고 난리를 치지. 이랜드 여성노동자들도 마찬가지긴 하지 그런데 또 다음 집회에서 만나면 해실해실 웃고 있어. 이 긍정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싶더라구(웃음)."

- 나도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외박>(김미례 감독)을 보았는데 노조의 ㄴ자도 모르던 평범한 아주머니들이 생계를 위협하는 거대 자본에 자신들의 방식으로 대항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어. 기존 노동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그닥 전략적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
"이제는 단번에 싸워 이길 수 있는 투쟁은 줄어들었지. 옛날에는 눈에 보이는 승리라는 게 있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덤볐다 물러났다를 반복하며 계속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해야 하는 싸움들이지. 자신의 일상을 잃지 않고 싸워야 오래 싸울 수 있어. 내 생각으로는 앞으로도 100~200년은 족히 더 계란으로 바위를 쳐야 할 것 같은데 그 동안 죽 대꼬챙이만 들고는 싸울 수가 없잖아. 싸움도 내 일상이 이어져야 하는 거지."

 2009년 일본 콘서트하러 갔을 때. 일본에도 꽃다지 팬들이 아주 많다고.
2009년 일본 콘서트하러 갔을 때. 일본에도 꽃다지 팬들이 아주 많다고. 꽃다지


<전화카드 한장>, 처음엔 욕 엄청 먹었어요

- 일상을 유지하면서 오래오래 싸울 수 있게 하는 음악… 그것이 꽃다지의 지향이 된 건가?
"응 그런데 그런 고민은 그 전부터도 계속 하고 있었어. 그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인 음악이 <전화카드 한 장> 같은 노래였지. 이 노래 처음 나왔을 때 엄청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구. 투쟁가요의 신심이 없다는 이유로(웃음).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처럼 비장미가 없고 말랑말랑하긴 하지.

투쟁 현장에서 팔뚝질하며 힘을 낼 수 있는 음악도 물론 필요하지. 그렇지만 새로운 투쟁의 현실에서는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을 토닥여주고 위로해주는 음악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그걸 우리가 하자고 한 거고. 처음 한 3년 정도는 현장에서 노래하고 내려오면 다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그런 노래는 현장에선 잘 안 먹히는 것 같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어. 그때마다 내가 반 농담으로 그랬어. "야, 이제 우리 나이 들어서 <가자 노동해방>같은 고음은 못해. 우리 그냥 좀 편한 노래 할게"(웃음)

투쟁가를 계속 부르는 사람도 있어야겠지만 모두가 그런 노래만을 부를 필요는 없다는 거지.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고. 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역사를 보더라도 수만 명이 행렬을 하면서 불렀던 노래들은 <일곱 송이 수선화>나 <우리 승리하리라> 같은 서정적이고 잔잔한 노래들이었거든. 이런 노래들이라고 해서 결코 투쟁 현장에 맞지 않거나 투쟁 의지를 북돋아주지 못하거나 하진 않았어. 나는 우리 노래가 사람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음악이었으면 좋겠어."

- 그런 시도가 쉽지만은 않았을 듯해. 그런 지향을 가진다 해도 음악의 방향이 바뀌는 거고, 또 그걸 음악으로 만들고 표현해 내는 것도 만만찮은 과제였을 테고.
"지금도 시행착오 중이야. 2001년에 <반격>이라는 곡을 냈는데 제목이나 가사만 보면 우리 노래 중에 가장 빡센 노래거든(웃음). 그런데 우리는 이걸 힘을 빼고 부르고 싶었어. 노래 중에 "반격!"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부러 힘을 빼고 더 느슨하게 간 거야. 또 욕을 엄청 먹었지. 맥아리가 없다고(웃음). 그런데 그것도 애초 우리 마음만큼은 힘을 못 뺀 거야. 1년간 열 번 정도 편곡을 했을 거야.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는데 3년쯤 지나니 무대에서 <가자 노동해방> 대신 이 노래를 넣더라구. 천천히 우리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지. <반격>은 잘된 케이스이고, 사실 잘못된 판단도, 실패도 많았어. 제일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박수 받고 있는 팀으로서 실패도, 욕 먹는 것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2002년 꽃다지 10주년 콘서트.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노래로 소통하겠다는 이들의 희망은 지금도 뜨겁게 진화 중이다.
2002년 꽃다지 10주년 콘서트.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노래로 소통하겠다는 이들의 희망은 지금도 뜨겁게 진화 중이다. 꽃다지

-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해도 예전만큼의 호응이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너무 아픈 질문인가?
"안 그래도 우리만 보면 어떻게들 먹고 사는 거냐고 물어대. 그렇게들 걱정이 되나봐(웃음). 나는 이슬 먹고 잘 살아, 그래 버려. 요즘에는 "이젠 좀 다른 것도 먹고 싶긴 해"라고 덧붙이고. 사실 꽃다지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줄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요즘에도 각종 투쟁 현장이나 문화제에서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 격주로 구로역에서 구로지역 결식아동 돕기를 위한 거리공연도 2, 3시간씩 하고 있고.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순회 콘서트도 매년 하고 있지. 이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서 진행하는 거라 적은 비용으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자리야.

대학에서는 불러주는 횟수가 현저히 줄긴 했지. 예전에 대학 축제를 하면 대부분이 민중가수고 그 중에 한두 팀이 대중가수였는데 이제는 그 비율이 완전히 바뀌었어. 꽃다지가 가면 거의 유일한 민중가수인 경우가 많고 무대 나가도 뻘쭘해. 그나마 총학생회 몇몇만 무대 앞에서 열광을 하지, 나머지는 쟤네는 뭐야? 이런 시선들이고. 1000만 원 이상씩 들여 연예인을 섭외하는 게 총학생회의 능력이 되는 상황을 보면서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커지고 있어."

 8월 13일(금) 꽃다지의 콘서트가 열린다.
8월 13일(금) 꽃다지의 콘서트가 열린다. 꽃다지
- 어쩌면 답이 없는 질문일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꽃다지는 이들과 어떻게 만나갈 생각인 거야?
"이 세상에 꼭 앞장서서 싸우지 않더라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정말 많을 거라고 생각해.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그저 상식이 통했으면 하는 사람들 말이야. 사실 나도 이런 부류거든. 남들은 나를 좌파라고 하지만 나는 엄격히 말하면 중도우파 정도밖에 안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는 교과서에서 배운 그 정도의 상식을 지키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주 체제순응적인 인간이라구. 그런데 그 정도도 극좌파로 분류되는 상황이니 이 사회가 얼마나 엉망인 거냐구.

여튼 이야기가 좀 샜지만 나처럼 보수적이든 우파든 상관없이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 또 한편으로는 생의 어딘가에서 꿈을 가졌지만 정작 먹고 사는 것에 지쳐서 그 꿈과 열정을 잊어가고 있는 이들도 있잖아. 그들에게 꽃다지라는 세 글자가 그 꿈과 열정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그런 노래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

"그러자면 이번 콘서트와 9년 만의 신보 발매가 꼭 성공적이어야 한다"고, 디첼라는 몇 번이고 강조한다. 사실 이 인터뷰는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만난 게 아니라 서로 간만에 얼굴이나 보며 수다를 떨자고 만난 자리였고 물음은 딱 하나였다.

"디첼라님 꽃다지에서 활동했던 거예요?"

이 물음이 그녀의 14년 꽃다지 인생을 쏟아내게 만들었고 그만큼 그녀는 꽃다지로서, 민중가요를 만들고 부르는 문화노동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홍대 앞 작은 용산이라 불리는 '두리반' 친구들에게 직접 만든 비누를 가져다 주겠다며(요즘 꽃다지에서는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수제 비누도 판매한다. 물론 1인 실무자인 디첼라가 만든다) 총총 발길을 옮겼다.

꽃다지의 콘서트는 8월 13일(금) 늦은 8시,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린다. 티켓 예매는 꽃다지 홈페이지(http://hopesong.com)나 민중가요전문사이트 PLsong
(http://ticket.hopesong.com/donation.php)에서 가능하다. 2만5천원이지만 예매하면 2만2천원이다. 꽃다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꽃다지의 열혈 활약상도 함께 볼 수 있다.
#꽃다지 #민중가요 #콘서트 #노래패 #인기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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