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차 꽃다지 소속 문화노동자 민정연 대표
송민성
- 못 알아볼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웃음).
"그러게 나도 좀 걱정했는데 딱 알아보겠더라."
- 지리산 가서도 엄청 수다를 떨었는데 왜 디첼라가 꽃다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 몰랐을까? "워낙에 우리가 나이는 몇 살인지, 직장은 어디 다니는지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
- 하긴 그래. 그거 말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잖아(웃음). 그럼 그때도 꽃다지에서 활동했던 거지?"1997년 꽃다지에 합류했으니까 햇수로 14년 차야. 내가 서른두 살 나이에 늦깎이로 꽃다지 기획팀으로 들어왔거든. 그때는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더 후질 때라서 서른둘이면 뭔가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어. 기획팀 막내로 들어왔더니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 딱 한 명 있고 나머지 다 20대더라고. 주변에서는 왜 끝물에 운동권 들어가냐고 말리는 사람도 적잖았지."
- 그럼 그 전엔 무얼 했던 거야?"사교육 시장의 일원이었어(웃음). 나는 대학 때 운동권도 아니었어. 대학 딱 들어가니까 선전물이라고 주는 데 너무 조악한 거야. 등사기로 밀어서 찍은 건데 글씨를 알아볼 수도 없어. 아니, 알아볼 수도 없는 걸 왜 주는 거야? 이러면서도 참고 좀 읽어봤는데 언어는 또 왜 그리 투박한지.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답을 일찌감치 내렸지.
그러다 85년 5월 대동제 때 광주 사진전을 보았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충격이나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경지의 감정들이 생기더라구. 그 무렵 나는 남파간첩들이 우리 군복을 입고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고, 시민군에도 위장간첩이 있어서 선동을 하고 있다는 류의 이야기를 철석 같이 믿고 있었거든. 내가 그렇게 오해하고 외면하는 동안 이렇게 짓밟힌 사람들이 있구나,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너무 컸어."
- 그렇게 이쪽으로?(웃음)"바로 오진 않고(웃음). 대학 4년 동안은 공부만 열심히 했어.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돈도 벌어야 했고. 학원 한 5, 6년쯤 다니고 나니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더라. 그때 나는 뭘 원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떤지 좀더 충실히 직시했지. 무엇보다 80년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점점 커져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어.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문화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95년부터 기획자 강의를 듣기 시작했지."
- 이렇게 들으면 굉장히 간단하지만 적잖은 모색과 고민이 있었을 듯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던 건지?"거창한 무언가가 있었다기보다는 가끔 집회에 나가면 벌벌 떨릴 때마다 같이 부르던 민중가요가 엄청 힘이 되었던 기억들이 크게 작용했지. 민중가요는 내게 나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했던 기억들인 거지. 한 2년을 고민하다 결국 노래가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 내 체험 속에서 나온 확신이니까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
민중가요 판으로 들어가자고 결론은 내렸는데 내가 노래를 너무 못 하는 거야. 그래도 노래패에 가려면 뒤풀이에서 한 곡 정도는 뽑을 실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었어(웃음). 내가 진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음치에 박치거든.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고등학교 때 가창 시험을 보면 그렇게 엉망으로 노래를 부르면서도 잘하고 싶은 욕심에 "다시 할게요"를 한 몇번 반복하다 결국 노력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좋은 점수를 받고 내려가곤 했어(웃음)."
- 그래서 기획자의 길로 접어들었구나(웃음). 그렇다면 여러 민중가요패 중에 굳이 꽃다지를 선택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거야?"민중가요 판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하고는 민중가요 음반을 다 구해서 들어봤어. 그 중에 꽃다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해오면서 끊임없이 변신하려는 노력이 느껴졌어. 물론 다른 노래패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나랑 가장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거야.
그러던 차에 97년 3월에 꽃다지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 지원했지. 한겨레 생활광고였는데 '꽃다지 식구를 찾습니다' 뭐 이렇게. 어찌나 촌스러운지 눈에 확 띄더라구(웃음). 어머, 식구를 찾는대... 킥킥거리며 지원을 했지."
기획자만 9명... 아이돌 못지 않았던 90년대의 꽃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