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된 집단희생자들의 유해
심규상
좌익이라는 이유로, 우익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들에게 찾아온 또 다른 공포는 북한군에 대한 '부역 혐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군경은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대전형무소는 같은 해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긴급명령 1호, 1950년 6월 28일 발효, 이하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수감된 사람들로 꽉 찼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는 1만 1992명에 이르렀다(1950년 11월 15일 내무부가 밝힌 내용). 검거된 부역자는 군법회의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가장 빠르게, 졸속으로, 증거 없이", '사법 살인'의 대명사 '특별조치령''특별조치령'에 의한 처벌은 매우 엄중했다. 중대범죄와 일반범죄에 대해 사형, 무기징역, 유기징역 10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특별조치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만들어진 법령 중 가장 엄중한 형벌을 규정한 법령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북한군에 대한 정보 제공, 안내, 자진 방조 등 애매한 규정으로 자의적 법 해석이 난무했다. '자발적 협력자'가 아닌 '위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사람들'도 엄중 처벌됐다. 게다가 기소 후 20일 이내에 공판을 열고, 40일 이내에 판결을 하도록 규정했다.
"판결에 있어서는 증거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는 조항(제11조)과 단심으로 하고 지방법원 또는 동 지원의 단독판사가 행한다는 조항(제 9조)을 통해 처벌을 가장 빠르게, 졸속으로, 증거 없이 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증거재판주의와 심급제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형의 집행은 '사법 살인', '법률적 학살'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한인섭, 서울대학교 법학 41권 2호, 2000년, 139~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