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국무총리로 내정된 김태호 전 경남지사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에 들어서며 취재진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남소연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정치를 처음 시작할 당시 금품 살포로 구속된 국회의원 후보자를 옥중 당선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 후보자가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정치 감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국무총리 경력의 출발점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김 후보자는 1992년 한나라당 이강두 의원(현 국민생활체육회 회장)의 보좌관으로 채용되며 정치권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의 확인취재 결과, 김 후보자는 이 의원이 같은 해 14대 총선(경남 거창)에 출마할 때부터 선거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문제는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강두 후보가 금품 살포로 물의를 빚고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는 점이다.
이 후보의 선거운동원 2명은 그해 2월 23일(이하 1992년) 민주자유당(한나라당의 전신) 거창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한 당원 3000명에게 식비와 교통비 1만3000원씩 총 3900만 원을 살포했는데, 1만 원권 지폐뭉치를 주고받는 현장이 이튿날 <국민일보>에 사진 기사로 보도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금품을 뿌린 현장이 적발되자 여당과 검찰은 사건의 파문을 덮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2월 26일 이강두 후보와 신모 사무국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표(YS)는 이 후보의 공천을 철회하고 이현목 신흥토건 사장을 새 후보로 내세웠다.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 후보의 가족조차 "선거를 포기하고 당국의 선처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바꾼 사람이 바로 김태호 후보자였다.
한나라당 거창 당원협의회의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연일 신문과 방송에서 '거창 사건', '거창 사건' 떠들어대니 이 후보의 가족들은 마치 죄인처럼 움츠러들었는데, 김 후보자는 '이강두 후보가 큰맘 먹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지금 무너지면 앞으로 아무 일도 못한다. 옥중 출마라도 해야 하고, 충분히 승산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 후보자는 30세의 청년이었지만, 손윗사람들도 그의 얘기를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유학하면서 YS의 최측근 김동영 전 정무장관의 집에 기거하며 현실 정치를 어깨너머로 배웠고, 대학생 시절에도 김동영씨의 선거운동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선거에는 잔뼈가 굵은 인물'로 통했기 때문이다.
선거엔 잔뼈가 굵은 인물... "김태호 후보자가 옥중 출마 권유"이강두 후보가 옥중 출마를 결정하자 김 후보자의 호언대로 일이 술술 풀렸다.
우선 거창의 당심(黨心)이 중앙당의 방침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거창 당원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그 당시 거창의 민자당 당원이 3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당원의 절반가량이 이 후보와 함께 탈당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여당 후보는 조직을 넘겨받지 못해 줄곧 고전했다"고 전했다. 고 김동영 장관의 보좌관 등 6명이 출마하는 다자대결 구도도 조직이 탄탄한 이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강두 캠프 사람들을 무엇보다 놀라게 한 것은 거창 주민들의 마음을 파고든 김 후보자의 선거 전략이었다.
이강두 캠프에서 김 후보자가 맡은 직책은 선거기획팀장. 후보와 사무국장이 모두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캠프의 '브레인'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김 후보자의 비서실장을 맡은 최기봉씨는 "(김 후보자가 1992년 총선에서 선거기획팀장을 한 것은) 맞다"며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꿈을 가지고 여러 가지 공부를 했고, 서울에서 상도동계 어르신들의 정치를 지켜봤기 때문에 30세 나이에 선거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강두 캠프는 "정직하고 순진한 이강두 후보가 중앙정치의 희생양이 됐다"는 논리로 지역 민심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