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65회)

회음도(會飮圖) <3>

등록 2010.08.17 11:42수정 2010.08.1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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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왕 때의 금주령은 술과 전쟁이라고 해야 합당한 말이었어요.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의질 꺾지 않은 대왕은 오히려 금주령 어기는 자를 사형에 처하는 과격한 법을 시행했으니 그로 인해 상소를 받자 사형만은 철회했으나 상벌이 완화된 건 아니었어요. 그 후로도 금주령에 걸린 양반들이 흥화문 앞으로 끌려온 걸 볼 수 있었으니 여전히 술을 금하는 위세는 짱짱했어요."

세상이 바뀌었다. 이젠 어디서든 맘놓고 편히 술 마실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정순왕후는 소격서를 다녀온 직후 측근들에게 주연을 베풀었다. 금주령 파동의 아픈 기억 때문에 정순왕후가 주연을 베푼 것이라 생각했는데 본인이 참여치 않고 도승지만 보내 하례한다는 말을 전했으니 어딘가 격이 떨어졌다.


"이보시게 정수찬, 대왕대비께서 연회가 열리는 북악의 한 장소를 가리키며 다녀오게 했으니 나는 별 생각없이 다녀온 것 뿐이네. 그곳에 가면서 특별한 일이 있을 것이라 여겼겠는가? 거길 갔더니 정순왕후 측근인 오경환이 무척 반겨주더구먼. 잠시 후 모임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있더니 일곱 명의 화원이 나서기 시작했네."

그렇게 보면 계회도였다. 오경환은 그림이 어느 만큼 완성 됐을 때 자신을 그린 화원을 불러 그림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술자린 대비마마께서 내리신 것이네. 다른 뜻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계회도라 하기엔 당찮은 부분이 있으니 내 생각엔 회음도(會飮圖)라 명하는 게 좋겠네. 그런 줄 아시고 화원들 역시 그 점을 그림에 주지시키게. 이틀 후 인사동의 내외술집에서 다시 자릴 마련하겠네."

오경환이 털고 일어나자 그 자린 이내 파했으나 이틀 후의 술자린 분위기가 달라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정순왕후는 소격서에서 가려뽑은 열 명의 도학생도를 참석시켰다. 그들은 하얀 옷에 같은 색깔의 도건을 쓴 미동들이라 여겼는데 그 면면은 계집이었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정순왕후가 도학생도들로 여흥을 일구게 한 것인데 놀이판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안면이 있는 자들은 아니었네. 지방에서 떠돌던 화원이 몇이나 되었고 한양에서 이름을 날린 자들도 있었으니 모두 알아본다는 건 무리 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찍 자리를 파하고 돌아왔었네. 그런데 얼마 전, 서명화란 화원이 날 찾아와 그림 하나를 내밀었네."


그림은 다섯 명의 장한이 술을 마시는 <사인초상화(士人肖像畵)> 성격을 띄었는데 인물 됨됨이의 특징을 화가가 잘 나타내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게 중앙에 있는 인물로 왼쪽 귀 밑에 콩알만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누가 보더라도 오경환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림의 화제(畵題)로 쓰인 글귀가 '신축대경(辛丑大慶)'이니 신축년에 크게 경사스러운 일을 나타낸 것이라 여겼는데, 바쁜 공무 탓에 그 일은 그만 잊어버렸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그림이 떠오르더란 말일세. 해서 그림을 꺼내 바라봤더니 왕실의 숨겨진 일이 떠오르더구먼. 신축년이면 정월에 서명선(徐命善) 대감이 영의정이 된 일이 있었으나 3월엔 성천과 자산의 금점(金店)이 털려 쉰 냥의 금이 사라진 흉측한 사건이 있었네. 왕실이나 조정에서 보면 경사스러운 일은 상감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간행시키고 <영조실록(英祖實錄)>을 완성한 것이라 보겠으나 그 외에 경사스러운 일은 없었네."


"그렇지요."
"그렇다면 신축년엔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르고 그 일이 마무리 되자 술 마시며 그림을 그린 것이라 보네. 이보게 정수찬, 신축년에 그들이 크게 기뻐할 일이 뭐겠는가?"

"하오면, 대감께서 이곳 내외술집에 오신 건 그 그림 때문입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내가 봤던 그 그림은 완성본이 아니야. 인물들의 붓질은 그런대로 격을 갖췄으나 주위의 정물이 확실하지 않아 곧 잊고 말았는데 서명하 화원이 한 번 뵙고 싶다는 서찰을 보내 바쁜 공무 탓에 차일피일 미루다 전하의 명으로  도화서에 들른 길에 그날 서명하가 '신축대경'에 대해 입을 열더구먼."

심만기는 목이 타는지 상 위에 놓인 막걸리를 반 대접이나 들이키고 내려놓았다.
"그날은, 정순왕후가 심복으로 믿은 탓에 오경환을 형조참의에 추천했네. 정3품의 자리지만 선대왕의 계비가 오경환을 추천한 것이니 주상이라고 반대할 이유가 없는 데다 벽파쪽 인물 예판을 갈아치울 일이 생겨 전하께선 정순왕후 명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네. 이 일을 도화서에 있는 예판에게 알리려 왔다가 서명하를 만나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 돌아갔네."

그렇게 보면 도승지에겐 일말의 의심이 가는 건 없어 보였다. 가볍게 넘어갈 것 같은 사안에 대해 정약용의 물음이 날카로웠다.

"도승지 영감께 묻겠습니다."
"말씀하시게."

"전하께서 정순왕후의 청을 받아들인 게 예판을 갈아치울 일 때문이라 하셨는데 어떤 일입니까?"

그 점에 대해 도승지 영감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허드레 기침을 두어 차례 뽑고 나서 목소릴 낮췄다.

"오래 전부터 전하께선 한양에 터를 내린 저들 사대부들의 전횡을 미워하셨네. 걸핏하면 파당을 이루어 왕권을 무시하는 저들의 행위를 보다 못해 수원에 성을 쌓고 그곳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했네. 그걸 아는 벽파쪽 인사들이 반역을 도모하여 궁안을 소란스럽게 한 게 아닌가. 그건 정수찬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해서, 도화서에 관심을 보인 건 전하께서 세손으로 계실 때 어진(御眞)을 그린 단원 김홍도를 불러 도화서 화원들의 수를 늘리게 한 것이야. 예년의 화원보다 숫자가 배로 늘어난 건 정수찬도 보아서 알 것이야."
"아, 예에."

"화원들이 도화서에 몰려 숫자가 늘어나면 전하께선 수원에 행차한 정경을 그림으로 남기실 생각이네. 그래서 단원에게 몇 가지 주문한 일도 있을 것이야. 그림이 사대부들의 놀잇감으로 보이지 않도록 해학적인 풍속화를 그리라는 것일세. 종전의 사인풍속화(士人風俗畵)와는 격이 다른 붓질 말일세."

도승지는 잠깐 말을 끊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예저기 걸린 그림들이 예전과 다른 그림 양식이었다. 실경산수화처럼  그대로를 사생(寫生)했다기보다 굽어지고 비뚤어진 해학이 눈에 띄어 친근해 보이기 일쑤였다.

"전하께선 단원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려는 계획을 하나 하나 나타내 보이시고 있네. 머지않은 장래, 단원으로 하여금 전하의 수원 행차를 그리시게 할 생각이니 어찌 소홀히 진행시키겠는가. 그리하자면 도화서를 관장하는 예판을 시파쪽 인물로 올려놔야 탈이 없을 것 아닌가. 해서, 오경환을 형조참의로 추천한 정순왕후의 청을 가납한 것이네."

"영감께서 서명하를 만나신 건 단지 그림을 그리는 화원이기 때문입니까?"
"거야 그렇지. 내가 붓질 하는 화원을 만날 일이란 게 그걸 제하면 뭐 있겠는가. 한데, '신축대경'이란 그림이 머릿속에 남아 떠나질 않더란 말일세. 그러던 차에 정순왕후 전각에 갔다가 오경환을 만났는데 도화서 일에 대해 묻던 그가 '신축대경'에 대해 꺼내는 어투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구먼."

오경환은 자신이 형조참의로 발령 난 것으로 믿고 엉뚱한 제안을 해 왔다.
"요즘 그림 그리는 화원들이란 게 어쩌면 그리 엉뚱한지 모르겠습니다. 단원이란 자도 전하의 보살핌을 받더니 뱃심이 오른 탓에 사대부가에서 청해도 오지 않기 예사고 바쁜 일이 있나 싶어 아랫것들을 보내니 시장바닥에서 술 취하기가 예사랍니다. 그 자가 중인(中人)의 몸으로 양반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 일이지만 이젠 임시직이나 다름없는 대령화원(待令畵員)이란 자가 그림 한 장 가지고 협박을 해대니 이 또한 두고볼 수 없습니다. 그 '신축대경' 말입니다."

신축년에 크게 기뻐했다는 회음도의 그림이 이젠 여러 가지 토를 달아 조정 중신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오경환이 점을 찍 듯 붙이는 토가 섬찟했다.

"대비마마께서 소격서에 다녀오신 후 북악에서 술자리를 열었잖습니까. 그때 어느 화원이 내 모습을 그렸는데 그게 반역을 일으킨 자들의 모임이라지 않습니까. 해서, 나는 아랫것들에게 명해 그림을 모두 없애 버렸는데 도승지 영감의 것만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요?"
"내가 가만 생각하니 '신축대경'이란 그림은 별거 아니에요. 성균관 옆 반촌(泮村)에 사는 어떤 이가 쇠고기 닷근을 주운 일이 있어 그런 제목을 붙였나 봅니다. 그걸 신축년에 대단한 경사인 양 떠들어댔으니 듣기에도 남사스러운 소문이 돈 게지요."

도승지 영감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허허 웃고 말았다. 술자릴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명하였다.

"영감, 드릴 말이 있어 기다렸습니다. 영감께서 대비마마 처소에 갔다는 말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 왔습니다만 지금 영감의 처지가 매우 곤혹스럽게 짜여지고 있음을 아십니까?"
"곤혹스럽다니?"

"북악과 인사동에서 주연을 베푼 자리에 화원이 같이 해 그림을 그렸습니다만, 그 자린 모두 벽파쪽 사람들로 행방불명이 됐거나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일을 했다는 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경환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그림을 불사르고 엉뚱한 그림을 한 장 그리게 해 계책을 꾸민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영감을 기다렸습니다. 오경환은 날이 밝으면 전하를 뵙고 소격서 무리들이 반역을 일으킨 자리에 영감이 있었다는 걸 알릴 것입니다. 자신이 형조참의에 앉는 걸 빌미로 살육을 벌일 계획이니 영감도 아시고 계셔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명하는 약속이 있다는 말을 떨구고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예측대로 오경환은 사흘 후 조아(朝衙)가 열리는 시각 한 폭의 <회음도>를 꺼내 도승지 영감을 공격했다.

"전하, 신 형조참의 오경환 세상이 놀랄 얘기를 전해 듣고 감히 상주하나이다. 도승지 심만기는 왕권이 가까이 있음을 필두로 간악한 소격서 적당들과 부화뇌동해 가무연락을 즐긴 증거가 드러났나이다. 신은 기유년에 그들과 회동한 그림 한 장을 구했사오니 전하께선 엄히 다스려 주옵소서!"

일이 상당히 고약스럽게 전개됐는데도 도승지 영감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자신 상황이 어찌 변해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역도로 몰리면 의금부든 사헌부든 뇌옥(牢獄)에 갇히는 건 당연했으나 그 자신 정순왕후의 명을 받아 일행들이 있는 곳에 간 것은 인정했다.

전하 역시 자신의 측근에서 일해 오던 도승지가 반역도로 몰려 애꿎게 죽게 됐음을 모르진 않았으나 자신의 힘으로도 구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반역의 무리들과 휩쓸렸으니 방도가 없었다. 오경환에게 탄핵을 받기 전 그는 전하의 면전에 꿇어엎드려 하직 인사를 올렸었다.

"전하, 무도한 자들은 어느 곳이나 있게 마련입니다. 신이 죄를 얻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은 소인의 허물 때문이오니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기유년(己酉年)에 궁 안을 번란케 한 자들이 어찌 소격서(昭格署) 무리뿐이겠나이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곳에 숨어 크거나 작게 계책을 꾸미고 있나이다. 전하, 다소의 멈칫거림이 있었으나 개혁의 기치를 반드시 높게 드옵소서!"

도승지는 뇌옥에서 전하가 있는 곳을 향해 사배를 올리고 사흘 후 참수되었다. 부귀와 공명이 눈앞이더니 그것은 안개처럼 이내 사라져버렸다. 도승지 심만기가 그렇듯 허약한 사람인가? 아니었다. 그가 뇌옥에 갇히기 전 집에서 부리는 사사(四四)라는 열다섯 먹은 종놈이 주인의 편지를 정약용에게 전했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하여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네. 내가 조금이라도 소란을 떨면 저들은 더욱 더 영악하게 일을 처리하리라 보아 내가 묵묵히 있었음을 정수찬도 아리라 보네. 조사해 보면 드러나겠지만 신축대경(辛丑大慶)이란 일은 분명 순금 50냥이 도난당한 사건이리라 보네. 그걸 저들 벽파에서 손을 댔기 때문에 모임을 갖고 술을 마셨으리라 보네. 지금은 그 날의 회음도가 없어졌다지만 분명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니 정수찬은 나의 죽음에 대해 애통한 마음이 있다면 저들의 몰염치한 행위를 명백히 밝혀주리라 믿네.>

서찰을 다시 한 번 펼쳐 읽으며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던 정약용은 말미에 끼적인 '반촌(泮村)'이란 글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주]
∎어진(御眞) ; 임금의 그림
∎반촌(泮村) ; 지난 날 성균관 근처에 있는 동네
∎조아(朝衙) ; 조회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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