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경찰청장 내정자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둘러싼 파장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무수한 발언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그것들 자체가 역사로 둔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말이다.
'연산군'하면 '폭군'이란 이미지가 절로 떠오른다. 채홍사를 전국에 파견해서 젊은 여성들을 모아 흥청이란 궁녀 집단을 만들어 흥청망청 살았던 왕. 사냥을 위해 백성들이 사는 민가를 허물었던 왕.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을 통해 수많은 선비들을 주살했던 왕. 그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의 반정(중종반정)에 의해 쫓겨났던 왕.
연산군의 폭정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성공시킨 사람들의 붓끝에서 조작된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이 사실 확인도 없이 음해성 이야기로 되살아나 권력 주변에서 떠돌았던 것처럼, 연산군을 힘이 없어진 뒤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왕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주변의 의도적 조작이 사실로 굳어져버린 건 아닐까.
자신들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둔갑시킨 사대부들
'종합부동산세'가 불편했던 사람들은 세금폭탄 운운하며 종부세의 부당성을 부각시켰다. 종부세와 아무런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도 종부세의 의미가 무언지 알지도 못한 채 세금폭탄이란 말에 넘어가 종부세는 폐지되어야 마땅한 것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헐리고 원망하며 근심하는 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조사(벼슬아치)들도 법을 범하면서 집을 지은 자가 많으니 헌부(사헌부)에서 당연히 죄주라고 청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말을 하는 것이냐?" (책 속에서)
연산군의 폭정 중 하나로 알려진 궁궐 담장 아래 백 척 내에 지어진 민가 강제 철거에 강력히 반대하는 신하들을 향해 연산군이 한 말이다. 국법은 궁궐 담장 백 척(30m) 이내에 민가를 지을 수 없도록 규정했다. 연산군은 그런 집을 철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사대부들이 앞장서서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궁궐 담장 30m 이내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이 아닌 사대부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국법을 어겨가며 궁궐 가까이 집을 짓고 살던 사대부들은 국법에 따라 집을 철거하겠다던 연산군에 맞섰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백성들의 이해관계로 둔갑시키면서.
흥청망청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음행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흥청은 연산군이 채홍사를 파견해서 전국에서 뽑아 올린 궁녀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 소속의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현재로 치면 국립OO합창단 정도다. 흥청이 모두 여성만으로 구성된 것도 물론 아니었다.
연산군에게 흥청은 욕정의 대상이 아니라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었다. 흥청악 공연 때 제조(조선시대 잡무와 기술 계통 기관에 겸직으로 임명되었던 고위 관직)일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땅에 앉도록 명했던 데서 알 수 있다.
사대부들이 성군으로 묘사했던 성종은 16남 21녀를 두었다. 전국에서 뽑아 올린 흥청에 소속된 궁녀를 비롯해서 1000여 명의 후궁을 두었다던 연산군은 4남 3녀를 두었을 뿐이었다.
패장은 말이 없고 쫓겨난 군주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 없다고 했다.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낙화암 전설로 국사와 백성을 팽개친 음란무도한 군주가 되고, 궁예 또한 관심법을 내세워 신하들과 왕비를 잔혹무도하게 살해했던 폭군이 되었다.
연산군도 마찬가지였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낸 사대부들의 명분을 위해 연산군은 사실과 다르게 폭군이 되고 음란무도한 군주가 되어야 했다.
과거의 거울에 현재를 비추어보면
귀감이란 말이 있다. 역사라는 거울에 현재를 비추어본다는 뜻이다. 이덕일의 <조선 왕을 말하다>를 읽다보면 귀감의 의미가 새롭게 떠오른다. 연산군을 둘러싼 사대부들의 이미지 조작이 현실 속에선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쇠락해가는 명의 권위에 납작 엎드려 의존하기만 했던 외교가 초래한 결과는 현실에 어떤 귀감으로 다가오는지, 태종과 세조가 걸어갔던 같고도 다른 길이 주는 귀감은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한다.
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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