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을 말하다 1> 표지
위즈덤하우스
연말연시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조선시대의 사관(史官)의 기록이니까 모든 이야기는 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당시에 법적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기 위해 신하들과의 만남은 반드시 사관이 배석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록은 신빙성을 갖는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프레임이라는 덫에 갇히는 법이다. 같은 사건과 사안이라고 해도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의 입장에 따라서 특정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조선왕조실록>도 예외일 수 없다. 효종과 숙종은 자신의 견해를 좀 더 자유롭게 피력하기 위해 사관 없이 신하와 독대한 적이 있고, 세조와 선조 등 몇몇 왕의 실록은 이후 정권의 당익에 따라 수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남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연전에 읽었던 <조선왕을 말하다 1, 2>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역사평설가 이덕일의 작품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덕일은 역사평설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에서 사료를 남긴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강한 목적지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목적지향성이 사료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엄밀하게 비판하지 않은 채 그들의 시각이 후대에 그대로 전해진다. 이러한 경우 한 인물의 실제 행적은 과거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목적지향성에 의해 일정 부분 가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현재의 역사인식이 조선 사관들의 가치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총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두 권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책은 네 개의 부(部)로 구성되어 있다. 두껍지만 <이시백의 조선왕조실록>만큼이나 흥미진진한데다가 새로운 사실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힌다. 사관의 기록과 무슨 무슨 '일기'나 '잡기', '강목'등과 같은 당시 사대부들의 기록들을 섭렵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해석능력은 읽는 재미를 더함은 물론, 우리 역사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계유정난, 왕권과 국세 약화시킨 최악의 쿠데타 이방원이 비록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왕이 되었지만 그의 치세는 왕권강화와 국가 안정이라는 엄연한 공적을 남겼다. 왕이 되자 공신들은 물론, 자신의 처와 처가식구들을 정치무대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아들 세종의 태평성대는 태종의 정지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면에 세종의 아들 세조는 정통성을 잃은 군주였다.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쳐 살해한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형이었던 문종의 아들 단종을 폐위시켰으니 헌정질서를 유린한 쿠데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야욕의 노예가 된 세조의 등장으로 조선은 시대의 물줄기에서 벗어나 표류하게 된다.
"세조 1년 12월 정공신(定功臣)의 자제, 사위, 수종자 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했는데, 무려 2,300여 명이었다. 가족까지 1만명이 넘는 공신들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1권 p.62)이렇게 공신으로 책봉되면 면책특권이 부여되고 막대한 토지와 직업(벼슬)이 보장됐으니 저자의 비판은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세조의 조치는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제거했던 특권층이 다시 부활하는 역사의 반동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공신들이었던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등은 세조가 죽으면서 도입한 원상제로 왕들 위에 군림하는 원상이 되어 여러 왕을 거치면서 정국을 주무르는 바람에 국력이 크게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들에게 국가의 모든 결정권이 주어진데다가 벼슬을 매매할 수 있는 권한을 야기하는 이른 바 분경까지 허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질투를 근거로 왕비를 내쫓은 성종은 연산군의 시대를 초래했고 연산군의 폭정은 아무 목표가 없는 것이었으며 중종 대에 가서는 모든 양반들이 세금을 면제 받으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국세가 기운 조선은 중국과 조선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