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컴의 '들쥐론'을 떠올려야 하는 슬픔

등록 2010.08.25 13:10수정 2010.08.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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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들어 30년 전에 들었던 미8군 사령관 존 위컴의 '들쥐론'을 자주 떠올린다. 위컴의 '들쥐론'은 내게 두 가지 모멸감을 안겨 준다. 한 가지는 위컴의 망언 자체가 안겨주는 모욕감이다. 생각할수록 불쾌하기 짝이 없다. 또 한 가지는 위컴이 파악한 우리 국민의 '들쥐근성'을 나 자신이 피부로 느끼고 인정해야 하는 데서 오는 민족적 열등감이다.  

위컴으로부터 그런 모욕적인 망언을 들은 때로부터 어언 30년이 흐른 오늘, 우리 주변의 들쥐 근성 만연은 더더욱 강고하다. 수많은 갖가지 현상과 행태들 속에서 무시로 들쥐근성의 표발을 느끼거나 접하곤 한다.

지금은 참으로 들쥐 근성의 표발이 자심하다. 쥐떼들의 출몰이 종횡무진이다. 어떻게 수습하고 근절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심정이다.

쥐들은 여기저기 없는 데가 없다. 원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쥐들이 있기 마련이고, 농작물이 있는 곳에도 꾀기 마련이지만, 너무 설치는 것이 문제다. 본래 습성대로 어두운 쥐구멍이나 들락거리며 은밀히 활동하면, 상심이야 늘 하고 살망정 공포감 같은 것은 갖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쥐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너무 노골적으로 설쳐대면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혐오감에 지치고 피곤하여 살맛을 잃기도 한다.

요즘에는 국회 청문회장에서도 들쥐근성의 약여하고 적나라한 노출을 본다. 위장전입은 기본인 갖가지 위법과 범법들, 뒷구멍에서 은밀히 벌어진 음흉하고 정당치 못한 일들은 모두 들쥐근성이 시키는 일이다. 행위 자체도 들쥐근성의 양태이고, 그 일을 감추고 있었던 것도 들쥐근성의 작용이다.

쥐들의 등쌀 속에서도 사람이 견디며 살 수 있는 것은 근성에 대한 명확한 분별력 때문이다. 쥐의 근성을 잘 헤아려 제어하거나 제압하는 지혜 덕분에 이성과 양심을 지닌 사람들의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들쥐근성이 사회에 만연되거나, 들쥐근성을 가진 자들이 너무 큰 힘을 가지게 되면 갖가지 기현상들 속에서 인간 세상의 공정과 공평은 힘을 잃고 만다.

이 세상 어디인들 쥐들이 없고 들쥐근성이 없을까마는, 30년 전에 이미 존 위컴이라는 미국인이 면밀히 파악하고 언급을 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들쥐근성은 오늘도 뼈가 시릴 정도로 자괴감을 갖게 한다. 들쥐근성의 압권은 수치심의 마비 또는 상실이다.


생각할수록 불쾌하고 슬프다. 하면서도 위컴의 '들쥐론'을 나는 오늘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 기억하는 데서 다시금 안게 되는 모멸감 등등, 이중삼중의 고통을 감내한다.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고자, 내가 옛날에 썼던 <위컴의 '들쥐론'에 대한 기억>이라는 글을 소개한다. 1993년부터 98년까지 만 5년 동안 충남 서산/태안 지역신문 '새너울'의 논설주간 노릇을 했다. 매주 사설을 전담하고 기명칼럼을 썼는데, 1997년 2월 3일 치 신문에 쓴 칼럼이 <위컴의 '들쥐론'에 대한 기억>이었다.  
     
위컴의 '들쥐론'에 대한 기억


 우리는 종종 일본인들의 망언(妄言)을 접하는 비운을 겪곤 한다. 여기에 '비운'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일본인들의 망언이 우리에게 거의 숙명적인 불행의 그림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며 우리에게 크나큰 민족적 모욕감을 안겨 주기도 하는 일본인들의 망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잊을 만하면 다시 튀어나오곤 하는 그들의 망언은 거의 주기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것이어서 매우 정교하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일본인들의 망언을 접할 적마다 우리는 분노한다. 망언 인사를 규탄하면서 외교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에 제재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비애스런 사실을 지켜보면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돌연 일본인들의 망언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망각이 빠르고 망각증이 심화되어 있는 우리에게 일본인들의 망언은 잠시나마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민족적 경각심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망언을 할 수 있는 그들 나름의 이유와 배경 따위를 짚어보면 일제에 봉사했던 과거의 친일 세력에 대한 분노도 새로워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민족적 모욕감과 분노를 갖게 하는 망언은 일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도 가끔씩 망언을 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80년대 초 미8군사령관을 지냈던 위컴의 이른바 '들쥐론'이다.

 위컴이라는 사람은 나에게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10·26 이후 12·12와 5·17과 광주민주항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던 시기에 미8군사령관을 지냈다.

 광주항쟁 진압과 5공 정권의 탄생 과정에서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미국의 '역할론'이 제기될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리는 중심적인 인물이다.

 위컴의 들쥐론은 80년 봄 신군부가 권력 장악의 기반 위에서 정권 탈취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시기에 나왔다. 매우 미묘하던 시기에 한결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었다. 그의 들쥐론은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은 근성을 지녀서 누가 지도자가 되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모두 그를 따라간다" 는 말로 요약된다. 새 지도자의 출현을 염두에 둔 것임이 너무도 분명한 이 말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중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민족적인 모욕감과 함께 신군부로 표현되는 부당한 '대세'를 지켜보아야 하는 참담한 아픔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인들을 분노케 한 위컴의 이 망언을 당시 언론에서는 제대로 비판도 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민족적인 모욕감을 안겨 주는 망언임이 너무도 분명한 이 들쥐론이 전두환에게는 민족적인 모욕감은커녕 오히려 큰 힘이 된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모욕적인 망언과 부당한 권력이 기묘하게 결합을 했다는 사실은 5공 정권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튼 나는 위컴의 들쥐론 망언을 잊지 못한다. 단순한 민족적 모욕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그 망언은 기묘한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의 망언이 우리 한국인들에 대해 고언적(苦言的)인 뉘앙스마저 풍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에게 껴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들쥐근성은 우리가 애써 퇴치해야 할 그릇된 성질이다.

 누가 지도자가 되건, 그가 무슨 일을 시키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따라가고 복종하는 '들쥐 근성'이 우리 민족의 근성일 리 만무하다.

 그러나 나는 위컴의 모욕적인 망언이 하나의 충고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사실 상황을 96년 12월 26일 새벽에 다시 발견했다. '문민정부'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로 11개의 법안을 여당 단독으로 단 7분 만에 처리하는 '날치기'를 보면서 나는 불현듯 위컴의 들쥐론 망언이 떠올렸다.

 1백60여 명의 명색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일사불란과 복종만이 있었고, 졸개들만이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컴의 들쥐론 망언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그저 참담한 심정일 뿐이다. *

                                                                (1997년 2월 3일)
#존 위컴 #들쥐론 #국회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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