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2일 오전 구리시 인창동 구리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국민경제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추석을 앞둔 아내는 벌써 걱정이 늘어졌다. 추석 차례에다가 오랜만에 모이는 열다섯 대식구가 며칠을 먹고 손님까지 대접하려면 신문이나 대형마트에서 발표한 차례 비용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더구나 몇 달 동안 고공행진을 하던 과일 야채값이 폭등·품귀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고 한다.
'늘 한가위만 같아라'던 덕담은 올해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비단 우리집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올해 연휴 중 가장 긴 추석 연휴를 앞두고 기다림보다는 어떻게 얇은 지갑으로 표 안내고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주변 곳곳에서 들린다.
사실 올라도 너무 올랐다. 수박 한 덩이에 2만원이 넘고, 복숭아, 포도 등 예전 같으면 5000원짜리 하나면 풍성했을 여름 과일들은 큰마음 먹지 않으면 선뜻 접근할 수 없는 가격이 되어 버렸다. 무 하나에 3500원, 오이 3개에 3000원, 고등어 한손에 6000~7000원을 넘어간다. 저녁 시장에 나간 아내는 떨이 야채 몇 가지에 한숨만 잔뜩 안고 돌아온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는 가격인데, 능력이 모자라 못 벌어서 물가 체감경기가 나한테만 이렇게 혹독한가?
정부가 추석을 앞두고 지난 2일 또 한 차례 물가 안정 대책을 내놓았다. 제수용품을 비롯한 21개 품목을 집중 관리하고 장기적으로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물가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곧 현실성이 있느냐는 논란부터 재탕 삼탕의 짜깁기 정책 발표라는 비판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런데 기자가 보기에 현실성이나 짜깁기 정책 논란보다 더 큰 문제는 물가 인상의 원인을 전혀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인을 엉뚱하게 진단하니 처방이야 약발이 먹을 리 만무한 것 아닌가?
유통구조 개선. 이 말은 물가 안정 대책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나오던 말이다. 생산자-도매업자-소매업자-소비자. 이런 유통 구조가 물가를 올리는 주범인 것처럼 이야기해 왔고 물가를 낮추는 길은 유통 단계를 줄이는 것이라고 강변해 왔다. 심지어는 대통령이 나서서 대형마트 때문에 힘들다는 하소연하는 상인들에게 인터넷 거래를 하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보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나 생산자의 물건을 대형마트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하는 것이 물가를 낮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면 그런 것 같다. 몇 단계를 거쳐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것보다 한 단계만 거치면 당연히 가격이 싸질 것 같다. 그러나 몇몇 기획된 상품들(X마트에 배추나 꽃게 같은)을 제외하면 재래시장보다 유통단계를 최소화한 대형 마트가 결코 싸지 않다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재래시장은 적은 이윤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고 대형마트는 많은 이윤을 독점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물가 안정 대책이 나올 때마다 소규모 자영업자, 재래시장 상인들이 마치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물가 폭등을 유도하는 주범처럼 취급받아 온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기름값 낮추기 위해 대형마트에 주유소를 만든다고?자영업자, 소규모 상인들. 이런 사람들은 물건값의 마진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정부의 주장처럼 소비자에게 값싼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서 유통단계를 줄여야 하고, 최소한의 마진도 물가 안정을 위해 포기해야만 한다면 이 땅에 사는 자영업자 대부분은 폐업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밤낮으로 일해서 서민들의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서비스 종사자로서 서민이라는 계층의 한 부류일 뿐이다. 서민의 물가를 잡기 위해 서민의 한축인 자영업자, 소규모 상인들의 희생을 강요는 정책. 기자가 생각하기에 정부의 물가 정책 첫 단추는 여기서부터 잘못 끼워졌다.
오히려 물가 인상의 책임은 대기업, 대자본과 정부에게 있다. 소비자를 독점하기 위해 시중가 5000원하는 배추를 1700원에 미끼 상품으로 내놓는 대형마트. 삼겹살 100그램에 800원에서 10원이라도 더 내려 시장을 독점하려는 대형 마트의 전쟁.
이런 대형마트의 가격 전쟁이 과연 물가 안정인가? 생산자에게 턱 없이 낮은 납품가를 요구하고, 삼겹살 가격 전쟁에 동네 정육점은 문 닫게 만드는 가격 횡포. 꽃게 가격 전쟁에 동네 어물점은 졸지에 이웃에게 폭리 장사꾼으로 취급받게 되는 현실. 절대적 비교 우위의 몇몇 미끼상품을 앞세워 모든 것이 제일 싸다고 믿게 만드는 대형 마트의 상술. 이것은 서민을 위한 물가 안정이 아니라, 자본의 횡포이고 시장의 교란일 뿐이다.
정부는 어떠한가? 최저가 공급으로 서민 물가 안정에 기여한다는 미명하에 서민의 밥그릇을 넘보는 대형 마트의 약탈적인 횡포에 '공정한 시장 경쟁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팔짱만 끼고 있다. 아니 오히려 물가 지수는 대형 마트나 농협, 수협 가격이 표준 가격인 것처럼 제시하면서 물가 안정을 이야기할 때면 꼭 재래시장, 소규모 상인들을 앞에 놓고 유통 구조 개선을 이야기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나온 이야기지만 유류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형마트에 주유소를 도입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유류의 세금이나 정유사의 독점적 마진은 손볼 생각 없이 단지 기름 값이 비싸니까 대형 마트에 주유소를 허가해서 기름 값을 낮춘단다. 동네 조그마한 주유소 사장님의 입장에서야 생존을 위협받는 억장 무너지는 발표가 아닐 수 없다.
유통구조 개선? 독점적 시장 구조부터 손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