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곰 습격에 목숨 잃은, 북극을 사랑한 남자

[서평]자연과 사람이 함께하는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등록 2010.09.14 11:59수정 2010.09.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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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하면 차가운 바람만이 휭하니 불 것만 같은 동토의 땅이 떠오르는 곳이다. 과거 러시아 땅에서 다시 미국 땅이 되었으며, 미국인들에게는 미지의 동경하는 여행지이겠으나 우리에겐 너무나 낯설기만 한 그곳. 대부분의 계절이 겨울이며 한창 추울 땐 영하 68도까지 떨어지는 이런 동토의 얼음땅이 좋아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사진을 찍으며 20년을 살았다는 작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무척 궁금해지는 책이다.

TV에서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모습을 보면 외모에서부터 무척 친근하게 느껴지곤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의 조상격인 몽골로이드가 1만 8천 년쯤 전에 북방 아시아에서 당시엔 물이 빠진 베링 해의 평원을 지나 이곳 알래스카로 건너왔다고 한다. 거대한 코끼리인 매머드가 번성하던 시절로 이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선조이기도 하다. 서양인들이 자랑하던 '프론티어 정신'은 사실 인종을 초월한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인가보다.


이 책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호시노 미치오, 청어람미디어)를 펼치면 사진작가인 저자가 오랫동안 살면서 찍은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들의 사진이 먼저 마음에 와 닿는다. 오로라가 춤추는 사진에서는 지구를 넘어선 우주의 신묘한 기운이 느껴지고, 에스키모인들이 고래를 잡는 장면에서는 잔인함보다는 우리네 어부의 치열한 삶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그의 글도 사진 못지않게 진실되고 잔잔한 감동을 준다.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들을 닮은 문장은 질박하면서 꾸밈이나 뽐내는 것이 전혀 없다. 그런 부담없는 글속에 종종 놀라운 성찰의 글귀를 만나기도 한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다보면 알래스카의 자연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나와 알래스카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바람같이 살다간 한 남자의 삶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사진과 글 - 호시노 미치오, 이규원 옮김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사진과 글 - 호시노 미치오,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먹힘으로써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삶으로 다시 시작한다 - 본문 중

지은이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이 쓴 글귀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여러 번 곱씹게 된다. 1996년 그는 여느 날처럼 사진촬영을 위해 들판에서 야영을 하다가  43세의 아까운 나이에 불곰에게 습격을 받아 자신이 사랑한 대자연으로 돌아갔다.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자연과 그가 만난 사람들, 신변의 일상과 사진작업,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유려한 사진과 함께 유작처럼 책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이런 운명은 19살 때 도쿄의 어느 헌책방에서 알래스카 사진집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알래스카의 자연에 매료된 지은이는, 이후 20여 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소중하게 기록한다. 오로라, 백야, 빙하, 극북의 들판을 이동하는 카리부(순록의 일종)떼,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위협받고 자부심을 빼앗겨버린 에스키모인의 삶 등 극한의 땅에서 만난 사람과 자연과 그 장대한 아름다움을 책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는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면만 보려하지 않았다. 좋은 것만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단지 대자연의 일부이면서 유일하고 전부인 지구의 땅끝마을 알래스카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사진들의 피사체는 대자연의 모습, 알래스카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자 호시노 미치오의 일상의 모습이고 삶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여태껏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지구 건너편의 또 다른 일상이기도 하다.

현대 문명에 스러져가는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

..편리한 문명생활과 등을 돌리고, 불편한 한 팔로 카리부를 한 걸음 한 걸음 둑 위로 끌고 올라가는 원주민 케니스.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언젠가 케니스가 나이 더 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죽어 가겠지."(본문 중에서)

예전에 에스키모 생활의 중심에는 카리부 (북미 지역에 서식하는 순록의 일종)가 전부였다. 에스키모는 철마다 카리부를 뒤쫓고 카리부와 함께하면서 정신적인 충만을 얻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서양 문명과 함께 화폐경제가 들어와 사람과 카리부의 관계가 약해지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족을 점차 새로운 문명과 가치관에서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가치관이란 것이 카리부하고는 달라서 아무리 쫓아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완성된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버렸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 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삶이 책 곳곳에 가슴 먹먹하게 담겨져 있다. 특히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알코올 중독 문제는 그 뿌리가 깊고 심각하다고 한다. 하기사 정신적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져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원주민들이 술로나마 배출구 노릇을 하는걸 누가 탓할 수 있으랴.

미국의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 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주었던 고유의 문화는 가차없이 잘려 나갔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니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인간이 행복하고 편리하게 살고자 만든 현대문명이 오히려 원주민 사회를 헤치는 이런 모순 속에서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에 지금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에스키모, 아사바스칸 인디언, 알류트 등 알래스카의 서로 다른 부족들이 손을 잡고 원주민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조금씩 일어서려 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라는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은 미미한 움직임일지도 모르지만, 한 줄기 희망의 불씨로 타올라 점점 커져가길 바란다. 

 자연이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이다 - 작가 호시노 미치오
자연이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이다 - 작가 호시노 미치오청어람미디어

자연이 이야기가 되는 곳

장대한 알래스카의 자연은 결국 인간도 언젠가는 그 질서 속으로 돌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해준다. 자연이 인간의 슬픔을 지워주지는 않지만, 그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어떤 힘을 선사해준다.(본문 중에서)

책에 담긴 알래스카의 자연은 종종 이야기가 담긴 풍경을 보여준다. 아니, 우리를 둘러싼 풍경은 전부 어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이 그 퍼즐을 읽지 못할 뿐. 아마도 그것은 자연의 모든 것이 예년과 똑같아서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말로 반복되어 간다.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하고는 무관하게. 자연의 질서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 개의 소중한 자연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가까운 자연, 그리고 좀처럼 갈 수 없는 먼 자연이다. 알래스카 같은 먼 자연은 비록 쉽게 가볼 수는 없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이런 귀한 책을 통해 거기에 그런 자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엇인가를 상상할 수 있고 그래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가끔씩 여행을 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지방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풍경은 결코 나와 참된 언어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런 여행은 하면 할수록 나만의 세계가 그저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소통하게 되면 풍경은 비로소 폭과 깊이를 띠게 된다. 이 책의 지은이도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과 함께 하면서 그곳의 자연이 말하는 이야기를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알래스카 변경지역의 원주민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미술 교사가 "학생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면 십중팔구 커다란 풍경 한쪽 구석에 아주 작게 인물을 그려요" 하고 책속에서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는 느낌이 어쩜 그리 우리와 비슷한건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들의 삶에 정이 가고 관심이 커진다.

지은이의 자연에 대한 생각도 참신하고 새롭게 다가온다.

"물보라를 뿜어 올리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고래가 자연이라면, 그 고래에 작살을 던지는 에스키모 사람들의 생활도 역시 자연인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이다."

내게도 알래스카에 가볼 운명이 닿는다면, 책의 말미에 나오는 한겨울의 알래스카 기차를 타고 싶다. 매주 한 차례씩 알래스카의 주요 도시인 페어뱅크스와 앵커리지 사이를 왕복하는 열차로, 평균 시속 48킬로미터로 550킬로미터의 거리를 11시간 동안 달린단다.

극한의 알래스카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열차. 가도 가도 새하얀 세상, 겨울날 알래스카 철도를 타면 시간의 흐름이 멎어버릴 것 같다. 알래스카의 기차는 '플랙스톱'이라고 하여 철로변 어디서나 손을 흔들어서 열차를 세워 탈 수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가족적이고 정겨운 기차인가. 그럴 수 있는 기차는 이제 알래스카 철도밖에 남지 않았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5


#알래스카 #호시노 미치오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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