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사진과 글 - 호시노 미치오,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먹힘으로써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삶으로 다시 시작한다 - 본문 중 지은이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이 쓴 글귀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여러 번 곱씹게 된다. 1996년 그는 여느 날처럼 사진촬영을 위해 들판에서 야영을 하다가 43세의 아까운 나이에 불곰에게 습격을 받아 자신이 사랑한 대자연으로 돌아갔다.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자연과 그가 만난 사람들, 신변의 일상과 사진작업,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유려한 사진과 함께 유작처럼 책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이런 운명은 19살 때 도쿄의 어느 헌책방에서 알래스카 사진집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알래스카의 자연에 매료된 지은이는, 이후 20여 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소중하게 기록한다. 오로라, 백야, 빙하, 극북의 들판을 이동하는 카리부(순록의 일종)떼,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위협받고 자부심을 빼앗겨버린 에스키모인의 삶 등 극한의 땅에서 만난 사람과 자연과 그 장대한 아름다움을 책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는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면만 보려하지 않았다. 좋은 것만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단지 대자연의 일부이면서 유일하고 전부인 지구의 땅끝마을 알래스카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사진들의 피사체는 대자연의 모습, 알래스카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자 호시노 미치오의 일상의 모습이고 삶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여태껏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지구 건너편의 또 다른 일상이기도 하다.
현대 문명에 스러져가는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 ..편리한 문명생활과 등을 돌리고, 불편한 한 팔로 카리부를 한 걸음 한 걸음 둑 위로 끌고 올라가는 원주민 케니스.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언젠가 케니스가 나이 더 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죽어 가겠지."(본문 중에서)예전에 에스키모 생활의 중심에는 카리부 (북미 지역에 서식하는 순록의 일종)가 전부였다. 에스키모는 철마다 카리부를 뒤쫓고 카리부와 함께하면서 정신적인 충만을 얻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서양 문명과 함께 화폐경제가 들어와 사람과 카리부의 관계가 약해지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족을 점차 새로운 문명과 가치관에서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가치관이란 것이 카리부하고는 달라서 아무리 쫓아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완성된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버렸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 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삶이 책 곳곳에 가슴 먹먹하게 담겨져 있다. 특히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알코올 중독 문제는 그 뿌리가 깊고 심각하다고 한다. 하기사 정신적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져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원주민들이 술로나마 배출구 노릇을 하는걸 누가 탓할 수 있으랴.
미국의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 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주었던 고유의 문화는 가차없이 잘려 나갔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니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인간이 행복하고 편리하게 살고자 만든 현대문명이 오히려 원주민 사회를 헤치는 이런 모순 속에서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에 지금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에스키모, 아사바스칸 인디언, 알류트 등 알래스카의 서로 다른 부족들이 손을 잡고 원주민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조금씩 일어서려 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라는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은 미미한 움직임일지도 모르지만, 한 줄기 희망의 불씨로 타올라 점점 커져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