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10일까지 <인권의 눈으로 본 언론> 강좌를 준비하면서, '군사문화와 언론'관련 자료를 찾다가 깜짝 놀란 글이 있었습니다. 아니 놀랐다가 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요.
<매일신문> 2007년 12월 10일 수암 김정길 칼럼 「勝者와 敗者」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난 주 高3 아이들이 입시전쟁의 첫 전투를 끝낸 수능 성적표를 받았다. 아직 나머지 전쟁이 다 끝나려면 멀었다. 대학 선택의 눈치 전쟁이 남았고 논술전쟁에다 면접 전투까지 뚫고 넘어야 할 격전지가 겹겹이 남아있다"
전쟁의 사전적 의미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운다'는 뜻과 함께, '극심한 경쟁이나 혼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칼럼 앞부분 세 문장에 전투와 전쟁이란 용어가 여섯번이나 사용되니 마치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 복판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중앙일보 고충처리인(언론보도로 인한 피해 예방과 자율적 구제를 위한 코너) 서명수씨에 의하면 "전쟁에선 내 편과 네 편의 편 가르기만 존재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탕해야 하는 게 전쟁이다"라며 "과도한 전쟁용어 사용은 갈등을 필요이상으로 부각해 불신감과 혐오감정을 부추김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폭력성을 확산시키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전쟁 용어를 순화하거나 바른 용어로 교정해서 써야 한다"는 당부도 덧붙이고 있는데요.
반복되는 군사·전쟁용어, '사회적 폭력성' 확산
<매일신문> 김정길 전 명예주필(현 대구예술대 총장)은 칼럼에서 쓴 것처럼 자제분에게 이야기했다면 청소년의 입장에서 이 말들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전쟁 용어'에 대한 문제는 스포츠경기뿐만 아니라 신문의 모든 면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고, 그 폐해에 대해서도 많은 지적이 있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부분입니다.
물론 언론인들은 이런 변명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의 의미와 특성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독자가 효과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용어를 선택하고 사용하려는 것은 언론의 속성이다. 전쟁 군사용어야 말로 우리의 역사적 배경도 있어서 일반에 가장 익숙하고 인식하기도 쉽다. 의미 전달이라는 목적만 감안한다면 자극적 선정적 상업적 목적의 상업적인 용어 사용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중략)"-<동아일보 독자인권위> 황도수(변호사) 위원- (2009년 2월 19일)
하지만 '효과적, 자극적 용어'가 전달력은 높을 수 있겠지만, 그 용어들이 일상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감안한다면 '대체 용어'를 찾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다음 두 기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한국의 걸그룹이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한류 열기'를 불러일으킨다는 내용의 기사에 대해 <조선일보>는 <걸그룹의 2차 일본 '침공'>, <경향신문>은 <일본 달군 소녀시대, 주가도 덩달아 후끈>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기사 모두 다 전체적인 맥락을 전하는 데는 별 문제 없지만, <조선일보>를 칼럼을 읽고 있으면 마치 '한국의 걸 그룹이 태권V를 타고 일본 열도에 상륙작전'을 벌이는 그림이 상상되는 것은 저만의 개인적 느낌일까요?
또한 한국 걸그룹이 일본언론에게 어떤 점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면 왠지 그 언론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울컥하는 감정에 반박성 댓글이라도 달아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가슴속 깊이 무의식 속에 숨겨진 저의 폭력성이 슬금슬금 자극받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경향신문>기사를 읽으면 'SM사가 마케팅을 잘하는 구나'정도로 생각하고 신문을 넘겼습니다. 참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전쟁용어, 국가정책에선 폐기 흐름, 언론은 '확산'
'전쟁'·'전투' 용어들이 국가정책에서는 점차 폐기되는 흐름이지만 언론에서는 역으로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CBS 노컷뉴스>가 지난 5월 28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 폐기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용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전략까지 변하는 것인데요.
기사 내용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27일(현지시간)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이라는 용어를 공식 폐기하고, 부시 전 행정부가 표방한 '선제공격론(pre-emptive war)'과의 차별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발표했다"며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16개월 만에 처음으로 공식 발표된 이날 '국가안보전략(NSS.National Security Strategy)'보고서는 우선 "미국은 테러리즘이라는 전술이나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흐름은 2009년부터 예견된 것입니다. 국민일보 <'악의 축' 용어 폐기…美 안보패러다임 바뀐다> (09년 4월 2일)에 따르면 "미국의 세계 안보전략이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며 "정권이 바뀌고, 세계 안보 환경이 변화면서 대응책도 바뀌고 있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변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제시했습니다.
"2001 9.11 이후 미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했던 용어인 '테러와의 전쟁'이 '해외 비상작전'이란 표현을 사용해왔다"고 제시하고 "강경 네오콘이 세계 안보전략을 주무르던 시절의 용어가 폐기된 것은 이른바 미국의 스마트 외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라고 그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군의 공식문서에 '전쟁 기획'대신에 '방위 기획'으로 대체해 사용한 것은 2006년 고 노무현 정권 시절부터였습니다.
<경향신문> 2006년 4월 19일 <군 용어 '전쟁기획' 대신 '방어기획'>에 따르면 "군의 공식문서에서 '전쟁기획'이란 용어가 사라진다"며 "안보개념이 비군사적 부분까지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전쟁 기획'이란 용어를 '방위 기획'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국방부 관계자가 밝혔다고 하네요.
그 이유에 대해 "모든 국가들이 주변국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방위(defend)'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며 "일본의 경우도 국방분야에서 방위(예)방위 백서)라는 말을 쓴다"고 덧붙이고, 국방부는 2022년을 목표로 한 3대 국방정책 기조를 담은 '2066~22년 국방기본 정책서'에도 방위 기획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올해 5월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 폐기했지만, 한국 언론 특히 지역언론에서는 아직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네요.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는 '뉴스'의 의미를 무색게 하고, 더군다나 그것이 대구경북권 언론이라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전쟁·군사 용어' 문제점과 개선책 함께 찾겠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국가 정책이 변하고 있지만 언론은 아직도 군사정권시절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언론이 '효율성과 전달성'만을 생각하며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군사·전쟁 용어들이 우리의 삶속에 스며들면서 '영웅주의', '승자독식', '적자생존'등의 가치관을 심어놓고 '건강한 경쟁, 대화와 타협'보다는 '적군과 아군 이분법으로 나누고 상대를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섬뜩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출근시간 지나친 교통체증, 입시 경쟁 중에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폭력적 단어와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게 되면, 그 원인의 많은 부분이 언론 때문입니다.
참언론대구시민연대는 이번에 <인권&언론>강좌 수강생들과 함께 '인권 친화적 언론환경 조성을 위한 인권 침해적 언론보도' 모니터 활동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기존 사례가 많이 없기 때문에 다소 힘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구시대 관행, 전쟁과 폭력을 당연시하는 언론문화, 그에 영향 받는 우리네 삶은 조금 더 평화적이고 합리적으로 바꿔보자는 목표를 세웠으니, 조금씩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오늘,평화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글쓴이는 참언론대구시민연대(www.chammal.org) 사무국장입니다.
2010.09.14 16:23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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