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산성: 5번 서산성, 8번 삼거리토성, 8번 삼양리토성, 15번 관산성
이상기
삼국시대를 다룬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다. 그 중 정사는 <삼국사기>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논문은 <삼국사기>를 토대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를 참고한다.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세 군데 나온다. 「신라 본기」 진흥왕조와 「백제본기」성왕조에 나온다. 그리고 「열전」 김유신조에 나온다.
「신라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성왕은 가야(加良)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다. 신라는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아 싸웠으나 세가 불리해졌다. 이에 신라의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그 지역 군사를 이끌고 와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때 비장(裨將)이던 삼년산군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백제군을 공격하여 백제왕을 살해했다. 그 결과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 좌평 4인과 사졸 29,6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백제본기」는 전투상황보다는 성왕이 구천에서 죽었다는 내용을 간단하게 전하고 있다.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여 몸소 보기(步騎) 50을 이끌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가 복병을 내어 더불어 싸우다가 어지러운 가운데 죽임을 당하였다. 시호를 성왕이라 했다.
또 다른 사서인 <일본서기>는 관산성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 성왕의 왕자인 여창(餘昌)이 신라로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마련한다. 이에 성왕이 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하들과 함께 금강변까지 간다. 이에 신라에서는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길을 막고 백제군과 맞선다. 그 결과 성왕이 사로잡혀 참수 당한다. 왕자인 여창(餘昌)은 원병인 왜군(倭軍)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옥천 향토사연구회, 정말 애 많이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