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2008년 9월 25일 서울 여의도 렉싱턴 호텔에서 열린 자유선진당 정책간담회에 참석,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남소연
"남한 형제들과 협력하여 북한 독재체제를 반드시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여 '5년'을 기약하고 결행한 '남행(南行)'이었다. 그러나 "북한 독재정권의 무장해제"나 "북한 통치자의 파멸" 같이 꼭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13년이 지났고, 정말 공교로운 날에 황장엽 선생은 돌아가셨다.
북에서 살았던 칠십 평생의 자기 삶 모두를 송두리째 압살한 그 세습 독재가 3대째 후계자를 사열대 위에 세워 열병식을 받도록 한 그 날, 그 시각 직전, 휴전선 지척에 있는 서울에서 지켜보는 이도, 지켜볼 사이도 없이 황장엽 선생은 홀로 고요히 타계하셨다. 아마 임종을 혼자 맞는 그 심정은 평소대로 평정스러우면서도 회환으로 출렁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선생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바로 나 자신을 뼈아프게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만나서가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로, 지난 2002년 여름 무렵 전년도부터 거의 1년간 선생과 정기적으로 만나 진행했던 '인간중심철학' 토론 모임을 슬며시 끝낸 뒤 후일을 기약했음에도 거의 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탓이었다.
당시 그 모임을 같이 하던 '사회와 철학 연구회' 멤버들과 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주제로 연구서를 내기로 했었다. 하지만 나만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뒤 나온 선생의 저작들을 두 차례에 걸쳐 전달받으면서도 나는 그 분의 집필물 궤적을 제 시간에 쫓아가지 못했다.
자기 철학을 가로채인 철학자의 공화국 그 분을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이 바로 어제 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로서는 그 분을 만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단지 선생이 주체사상의 창시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이라면 정치학자들의 정치공학적 분석으로도 충분하였다.
1997년 2월 선생이 일본 일정을 마무리하고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귀환하던 중 돌연 베이징의 주중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을 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북한 체제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달과 명예를 이룬 분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가족 하나 데려오지 않은 채 단신으로 '남조선'에 올까?
주석의 배려로 주체사상을 정립한 계관사상가, 북한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대학 스승, 북한 최고 권력자 집안과 바로 사돈관계에 있었다(선생의 장남 경모씨는 바로 오늘 후계자로서 북한군으로부터 첫 공식 사열을 받은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생질과 결혼했었다). 선생의 남행으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는 알아보지 않아도 분명할 것이다.
나는 선생이 대한민국에 와서 처음 단행본으로 간행한 당신의 회고록(<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한울, 1999. 2.) 초판1쇄를 거의 현미경 대고 보듯이 면밀하게 읽었었다.
다른 독자가 그 책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선생의 책 안에는 '나는 철학한다'고 자신을 생각하는 이라면 가슴 저리게 공감할 수 있는 절실함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항상 '나는 철학하는 사람', '나는 철학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자신이 있을 자리와 자기가 할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단순히 철학과 교수나 철학적 교양인이 아니라 어떤 장소나 인간을 앞에 놓고도 실제로 자신이 철학한 대로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교육시켜 왔으며, 또 그렇게 자기가 철학한 결과를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살았다.
다시 말해서 황장엽 선생은 주석이나 지도자 동지의 사상적 주문에 충실한 이데올로기 심부름꾼이나 계급 혁명가이기 이전에 스스로가 철학하는 사람이었다. 선생의 회고록 전면에는 이렇게 자기가 혼신을 다해 철학하여 창안한 주체사상을 최고 권력자에게 헌납하면서 느껴야 했던 모멸감과 권력자 앞에서 그것을 숨기면서 살아야 했던 안쓰러움이 절절이 흐른다.
자기의 사상과 글과 이름을 통째로 가로채였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던 이로서는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김정일은 "수령관을 중심으로 하여 김정일을 내세우지 않고 내 개인의 철학 이론을 선전한 것이 잘못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라는 과업"을 당의 문서정리실에 주었다. 문제의 문건은 1996년 7월 26일에 김정일의 명의로 발표된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라는 문헌이었다.
이 문헌에서 선생은 주체철학이 본래 수령절대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 철학이라는 내용을 삽입해 모스크바 국제토론회에서 발표했는데, 이것이 당내에서 문제되면서 서서히 자신을 조여들었다고 술회했다.
즉 선생이 자기의 사상, 그것을 표현한 글, 그리고 자기 이름을 가로채인 것보다 더 견디지 못했던 것은 자기의 사상 자체가 수령중심주의로 왜곡되면서 체제의 실상을 기만하는 데 도용된다는 사실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어느 면에서는 대단히 고전적인 철학자였다. 이 점에서 선생의 수령과 그 수령의 후계자는 선생이 내심 감추고 있던 이런 철학적 신념과 철학자로서의 자기정체성에 대해서는 못내 무감각했던 셈이다.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나는 선생이 북한에서 이룬 그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 남행을 택한 절실한 동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면에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고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 이름으로 나의 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의 자유 또는 철학함의 자유에의 열망이었다고 내심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한국 현대철학 최후의 사상가적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