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어두운 계단, 습한 냄새를 뚫고 올라가니 뿌연 창문에선 슬그머니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서리가 다 낡은 검은 나무문을 밀어내자 어둡고 침침한 내부에선 비온 뒤 개인 하늘처럼 헨델의 아리아가 우아하게 울려 퍼진다. 그때 곁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이불을 헤치고 은발의 노인이 홀연히 일어선다.
"저... 음악을 들으러 온 건 아니고요..."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올해 나이 아흔, 백반 같이 희고 깨끗한 피부의 이 창수옹이다. 전국 최초 음악 감상실 '녹향'의 주인. 그는 이제 인터뷰 요청에 이골이 났는지 애써 새된 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잉지잉... 나이가 먹어스엉... 말이 어눌하공... 이래도 듣기 안 거북 안 할렁가 몰겠네."
곤한 몸을 좀 누이려니 들이닥친 불청객을 쫒아 보내려는 나름 귀여운 핑계에 슬쩍 웃음이 나온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음향사가 기조가 되어 해방 이후 전국 최초의 음악 감상실로 이름을 알렸던 곳, 수많은 문인과 화가, 음악가들이 거쳐 간 역사의 현장이라는 이곳의 뒷이야기는 대구를 관광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과 맞물려, 한껏 달궈진 과거로의 그리움을 안은 방문객에게 호기심을 선사하고 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중년 이상의 연배들은 자신들의 격하고 치열했던 한 시절, 고상한 클래식을 들으며 여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데이트 장소로, 혹은 방향도 끝도 모르고 치닫던 젊은 치기의 어느 지점을 달래주던 곳, 바로 그 '녹향'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젊은 세대는 자신이 살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무한 애틋함으로 녹향이란 낯선 이름에 다가선다. 먼지 앉은 음반만큼이나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애틋한 스토리텔링은 세월이 갈수록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이창수옹은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음향사에서 일했다. 어려웠던 그 시절, 그는 그곳에서 '이런 저런 온갖 일을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고 회고한다. 그 시절 클래식 음악이라니 의아한 기분이지만 조선 신지식인들과 부유한 일본인들은 일찍이 근대 문물을 접하여 클래식은 그들 생활 속에서 공기 같은 역할을 했다 한다.
식민지 하에서도 안온한 음악 속에서 조용한 한 때를 보내다 어느덧 해방이 되었고, 일본인 주인은 음향사를 곧 찾으러 올 터이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6·25가 닥쳐왔고, 대구로 피난 온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이름을 올리게 된 녹향에서 화가 이중섭은 기름 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담뱃갑에 그림을 그렸고, 문인 양병문, 구상, 유치환, 양주동, 최정희 등이 녹향의 전성기를 함께 보내며 그들 예술의 절정기를 거쳐 갔다.
녹향 초반기에는 미국문화원 사람들과 인맥이 닿아서 그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그곳과 사람들은 영어, 미술, 음악, 같은 예술 관련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미국문화보급용으로 나온 최신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 있었다 한다. 그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음악 듣기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해방 후 1년 정도는 축음기를 들고 회원들의 집을 전전하며 음악을 들었다 한다. 그 모임이 이름 없이 계속되다가 후에 녹향 음악실의 모태가 된 것이다.
1946년 축음기 한 대로, 클래식이라는 용어도 모르던 그 시절의 한국 땅에서 음악 감상실을 열었던 것이다. 그렇게 65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고, 곧 온다던 주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청년 이창수는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잊혀져간 '낭만의 블랙홀'을 오늘도 혼자 조용히 지키고 있다. 최근에는 음악가 정명화 등이 주축이 되어 '녹향 살리기'를 위한 클래식 공연도 여러 차례 했지만 그 성과는 미비할 뿐 음악의 흐름이 바뀌고 사람들의 취향이 바뀐 지금, 녹향은 이창수옹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인터뷰를 하던 도중 들뜨고 감격에 겨운 발걸음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실내로 들어선다. 음악실 구경을 하러 왔노라며 가장, 아내, 청소년 딸이 인사를 꾸벅한다.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반가운 가족을 만난 듯이 말을 잊지 못하고, 내부를 둘러보며 감동에 겨운 얼굴을 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성실한 블로거가 올린 녹향의 역사와 가치를 실제로 접해 보고자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노인은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이 반갑지만은 않다. 언론에 떠들썩하게 몇 번 나가면 이따금씩 손님이 몰려오지만 그들 역시 호기심에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고, 혼자서 종일 그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것에도 이제 충분히 적응이 된 탓이리라.
손님이 없으니 건물 임대료 내기도 힘든 생활을 계속하며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매일 12시에 출근하고 저녁 8시에 퇴근 하며 운 좋게 손님이 들면 입장료 5000원을 받아서 퇴근길 단골 식당에 들러 때늦은 저녁을 먹기도 한다. 지금은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에 말투도 또박또박하고 건강하지만 노인의 일상이란 앞길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법, 그러기에 지금 그의 애달픈 몸짓은 애처로운 2010년 녹향의 어느 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혼자서 역사의 공간 녹향에서 쓸쓸히 말년을 맞으며 지금도 역사를 안고 사는 그를 위해, 이제 대구시가 나서야 할 때이다. 녹향은 한국의 근현대 문화와 역사가 담긴 곳이며 그 안에 자리잡은 물건들은 한국 역사 속 예술가들의 손때와 이야기가 담긴 것들이다. 새로 부수고 개발하고 관광객들에게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문화재가 아니라 저절로 닳아서 오래된 것, 귀한 스토리텔링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문화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 가운데 시민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공무원의 모습도 필요하다.
지금 대구는 문화재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너무 개발에만 의존하고 있다. 장수 기업이 많은 일본에는 100 년이 넘은 가게가 많다고 한다. 그들의 장인 정신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나라에서 이 기업들을 문화재처럼 보호하고 관광 자원화 하여 오랫동안 가업을 잇게 만든 것도 큰 연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최지우, 배용준이 나오는 드라마라도 촬영한다면 세인의 벅찬 관심을 받게 될 런가 하는 씁쓸함만 가득 안은 채 낡은 계단을 밟고 내려온다. 아흔 노인의 맑은 눈동자만큼이나 청명한 가을, 대구의 어느 날이다.
2010.10.24 15:21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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