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지리산 자락에 뼈를 묻기로 했지만...

박남준 시인의 새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등록 2010.10.31 12:39수정 2010.10.3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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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준 시인의 새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박남준 시인의 새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문학사
박남준 시인의 새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 실천문학사

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시보다는 '시인이 쓴 연보'에 먼저 눈이 갔다.

 

"2010년 악양에 뼈를 묻기로 했다. 여섯 번째 시집이다. 뭔가 좀 달라지고 싶었다. 그간 내 시의 주조를 이루던 정서는 슬픔이었다. 분노를 버리지 않았으나 밝고 즐거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글쎄……."

 

박남준 시인이 새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를 냈다. <적막> 이후 5년 만이다.

 

스스로 쓴 연보에서 암시하듯 그는 몇 가지 변화를 자청했다. 정주(定住)와 즐거움 그리고 그 무엇… 이다.

 

이 세 가지는 시인을 둘러싼 환경(관계) 변화를 설명하는 코드이자 시인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의 변화를 좇게 만드는 기표이기도 하다. 섬진강에 내린 노을처럼 농익을 대로 농익은 시인이, '뭔가 좀 달라지고 싶다'니….

 

첫 번째 변화의 기표인 정주를 가장 잘 드러낸 시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 가게>다. 박남준 시인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서사다. 하지만 그 어떤 시보다 지독한 눈물을 몰고 온다.

 

"하동에서 구례 사이 어진 강물 휘도는 길/ 비바람 눈보라 치면 공치는 날이다/ 집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 간이 휴게실이 있지/ 고물 트럭을 개조해 만든/ 재첩 국수와 라면, 맥주와 소주와/ 음료수와 달걀과 커피 등등/ 전망 좋고 목 괜찮아 오가는 사람들 주머니가/ 표 나지 않고 기분 좋게 가벼워지는 동안/ 눈덩이 같던 빚도 갚고 그럭저럭 풀칠도 하는데/ 빌어먹을/ 그 아저씨의 그 여자는 암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

 

소원이 있었댄다 꿈 말이지 웃지 말아요 정말이라고요/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깊이 모자를 눌러쓴 그 여자는/ 아저씨를 졸라 간이 휴게소 아래/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선풍기도 난로도 아니 전등도 하나 없는/ 간판도 없는 두어 평 비닐하우스 무허가 옷 가게/ 어려서나 더 젊어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반짝이는 반짝이 옷/ 너울너울 인형 같은 공주 옷을 파는 옷 가게/ 그녀에게서 사온 옷을 안고 잠을 청하면/ 푸른 섬진강 물이 은빛 모래톱 찰랑찰랑 간질이는 소리/ 동화 속 공주가 나타나는 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구례에서 하동 사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옷 가게/ 그녀가 웃고 있다"   -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전문

 

결코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구례에서 하동 사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옷 가게'다. 정주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관계가 시가 되어 아리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무와 풀과 꽃, 돌에게 정갈하게 투영되던 시인의 서정이 '알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따스하게 스며들고 있다.

 

그런데 아프다. 그런데 슬프다. 왜일까. 어쩌면 그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상 자체가 슬픔 덩어리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환한 봄날'에 관조 어린 체념이 오는 지 모를 일이고.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중 략...... 흰 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 <봄날은 갔네> 중에서

 

존재에 대한 쓸쓸한 거리두기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슬픔이 진화하는 방식이다. '분노를 버리지 않았으나 밝고 즐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는 시인의 바람은 어느 정도 이뤄진 듯하다. 물론 욕심 많은 그야 성에 찰리 없겠지만!

 

시인에게 대운하 사업이나 4대강 사업은 '어처구니없는 세상' 그 자체다. 그는 시로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치떤다. 행동하는 시인. 이런저런 구설이 뒤따르지만 개의치 않는다.

 

변함없이 예지 넘치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그러나 언뜻 체념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도 인간의 오만이 절정에 다다르면 숨어 있던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며 "많은 시에서 시인은 이것을 경고하고 있는데, 그것의 한 유력한 은유는 '범람'이다"고 통찰했다. 시 <운하 이후>에서 이미 강과 자연과 하나가 돼버린 시인은 이렇게 사나운 물이 되었던가.   

 

"이제 나는 범람할 것이다

무섭고 두려운 홍수로 넘칠 것이다

막힌 갑문을 부술 것이다 굴을 뚫은 산을 허물어 산사태로 덮칠 것이다

모든, 그 모든 나를 막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을,

이명박 표 운하를 해일처럼 잔재도 없이 파괴할 것이다"  - <운하 이후> 중에서

 

이렇듯 시인에게 정주는 세상에 머무는 즐거움이자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매개다. 그러나 시인은 정주함으로써 다시 떠남을 기약하고, 다시 슬퍼하며 분노하고, 다시 싸우고 있다.

 

정주의 역설이다. 정주와 홀연한 떠남의 윤회, 즐거움과 슬픔과 분노 그리고 눈물의 윤회.그 윤회가 시인 스스로 자청한 변화의 마지막인 '그 무엇'일터.

 

태어나 처음으로 뼈 묻을 곳을 정한 시인. 그곳에서 그의 꽃이 지고, 별이 뜰 것이며 시절이 흐를 것이고 시가 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조바심 내지 말고 '다만 흘러가는' 그의 낮은 음성을 따라 이 푸른 별의 어느 날을 추억하면 될 것이다. 허면 우린 눈물 그렁하게 즐겁지 않을까.

 

"꽃의 눈부심에 갇혀 자괴에 빠졌다

새들의 창공에 매여 악을 쓰기도 했다

이십이었을 때, 삼십이었을 때

 

꽃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만져보네

새들의 하늘을 올려보다 걸어온 발등을 바라보네

이제 그만 나른해져야겠네"    - <나른한 오후> 전문

2010.10.31 12:39ⓒ 2010 OhmyNews
#박남준 #지리산 #섬진강 #악양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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