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시공사
▲ 겉그림.
ⓒ 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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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엄마랑 아이 아빠가 보는 그림책은 같지 않습니다. 아이 엄마랑 아이 아빠가 같은 그림책을 보더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나 마음은 다릅니다. 서로서로 참 좋다고 느끼는 그림책이 있고, 한 사람만 좋다고 여기는 그림책이 있으며, 서로 내키지 않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아이 아빠 된 사람으로서 아이 엄마보다 그림책을 더 잘 읽어 내거나 받아들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 아빠는 여러 가지 이론책을 읽었고,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이 아빠가 아이 엄마보다 그림책에 깃든 넋이나 땀을 한결 잘 알아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지식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라면 아이 아빠가 할 말이 있겠지요. 그러나 지식이 아닌 삶을 보여주는 그림책이 되거나 사랑을 나누는 그림책이 된다든지 믿음을 펼치는 그림책이라 한다면 사뭇 다릅니다. 아이 아빠는 아이 엄마한테 여러모로 배워야 합니다. 아이 아빠는 지식을 내려놓고 마음을 보듬어야 합니다. 비평이든 평론이든 곱다시 내려놓고 웃음과 눈물을 살며시 얼싸안아야 합니다.
그나마 저는 집에서 몇 가지 집일을 꽤 하고 있어 여느 아이 아빠보다는 그림책을 조금 더 깊이 읽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그나마 거의 모든 아이 아빠들은 집일을 할 겨를이 없을 뿐더러, 집에서 느긋하게 오래도록 지낼 만할 때에도 집일을 잘 거들지 못합니다. 아이하고 놀아 주기는 할 테지만 '놀아 준다'뿐이지 아이하고 '함께 살며 놀지'는 못해요.
그림책이든 어린이책이든 초등학교 교과서이든 으레 학자들이 쓰고 엮습니다. 집일을 하지 않거나 집일하고는 울을 쌓는 남자 학자들이 흔히 쓰고 엮습니다. 집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아마 거의 여자일 테지요)는 글을 쓸 틈이 아주 적으며 가까스로 글을 쓴다 하더라도 책으로 내주려는 곳이 몹시 드뭅니다.
정작 그림책을 아이랑 함께 읽는 사람은 '여자 어른(어머니)'이기 일쑤이지만, 아이랑 그림책을 같이 읽으며 살아가는 어머니 눈높이에서 '그림책 이야기 이론'을 들려주는 학자는 몇 안 된다고 느낍니다. 어머니는 이론도 모르고 추천도서도 모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가르치려고 들 뿐입니다.
그림책 <피치>를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헌책방 일꾼은 이 그림책 값을 셈하며 "꾸준히 들어오면서 금세 팔리는 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앙증맞은 그림이 좋으며 수수한 이야기가 사랑스럽다고 말씀합니다. 저 또한 이 그림책 <피치>에 나오는 어린 고양이 삶이 애틋하다고 느낍니다. 구불구불한 그림결이 썩 괜찮고, 애써 꾸미려 들지 않는 그림투가 살갑습니다. 나라밖에서는 이와 같은 그림책을 알뜰히 그려내는구나 싶어 놀랍습니다. 그림결이나 그림투도 남다르다 할 만하지만, 수수한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빚는 솜씨하고 손길이 한결 반갑습니다.
온누리에 널리 사랑받는 그림책이라든지 세계명작으로 손꼽히는 그림책은 하나같이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니, 그림책만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가 명작으로 손꼽히지 않아요. 시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매한가지예요. 영화이든 연극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똑똑한 머리로 멋지게 지어낸 작품 가운데에도 훌륭하다 싶은 작품이 틀림없이 있는데, 똑똑하지 않은 머리일지라도 따스하며 넉넉한 가슴으로 빚은 작품은 거의 어김없이 착하고 참되며 곱습니다.
.. 피치는 잔뜩 겁에 질려서 더는 울지도 못하고 발발 떨고 있을 뿐이었어. 리제테 할머니는 피치를 안아서 집으로 데려갔어. 물기도 깨끗이 닦아 주고, 따뜻한 담요로 폭 싸 주었고. 그러고 나서 피치에게 우유병을 물려 주었어. 피치는 우유를 빨아먹었지! 리제테 할머니는 몹시 흐뭇해 했어 .. (22∼23쪽)
그림책 <피치>를 보며, 가녀린 고양이 한 마리를 비롯해 숱한 짐승을 아끼며 사랑하는 할머니 삶자락이 참 예쁘다고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오래도록 한식구로 여기며 살아가는 개가 고양이들을 괴롭히거나 해코지하지 않으며 알뜰히 돌보는 모습이 새삼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참말 좋은 할머니가 참말 좋은 삶을 일구며 참말 좋은 꿈을 나눈다고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제법 많은 나이인데에도 홀로 농사를 짓고 손수 밥을 하며 스스로 집안을 쓸거나 닦거나 치우며 살아갑니다. 무슨 일이든 몸소 하셔요.
아마 이 할머니가 시골집이 아닌 도시집에서 살아가는 분이었다면 퍽 많은 나이인데에도 온갖 일을 즐겁게 알뜰히 하지는 못하지 않았으랴 싶어요. 어쩌면 도시에서 가난하고 수수한 사람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신다면 집 안팎을 온통 꽃잔치로 가꾸면서 크고작은 텃밭을 알뜰살뜰 일구기도 하셨겠지요.
그러니까, 그림책 <피치>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라든지 씩씩한 여러 짐승들은 바로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면서 곱고 착한 기운을 받습니다. 할머니가 온몸으로 삭이며 살아온 이야기가 뭇 짐승 매무새에 살포시 깃들었어요.
.. (개) 벨로가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들어왔어. 예쁘게 장식된 생크림 케이크였지. 피치는 등에 쿠션을 받치고 의자에 앉았어. 여전히 특별 대우를 받은 거야. 피치는 리제테 할머니를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어. "정말 좋은 분이야! 다시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고양이들이 식탁에 앉아 있는 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 (31쪽)
그러나 이 그림책을 읽으며 아쉽다고 느낀 대목이 있습니다. 왜 '피치'라는 어린 고양이는 다른 짐승들 모양을 좇으려고만 했을까요. 왜 피치라는 어린 고양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 고양이는 피치를 고양이답게 사랑하며 돌보지 않았을까요.
그림책 첫머리에는 "언제나 다른 것이 되고 싶어하는 고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피치는 수탉이 되고 싶어 하고 영양이 되고 싶어 하다가는 오리가 되고 싶어 하면서 물에 빠져 흠뻑 젖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무언가로 되고 싶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느끼기로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프다는 삶이라기보다는 '피치다운 피치가 되는 길'을 모르는 삶이 아닌가 싶어요. 고양이로서 즐겁게 꾸리는 삶을 모르고, 고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어린이로서 신나게 일구는 삶을 모른다고 할까요. 퍽 철부지로 까불다가 큰코 다친다고 할까요.
이런 철부지 고양이 피치인데 리제테 할머니는 '어린 고양이이니까 철부지일밖에 없겠지' 하고 받아들입니다. 어린 고양이인데다가 아직 철부지이니까 더 사랑해 주고 한결 아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부대끼며 살림을 꾸리는 아이 아빠로서 생각합니다. 살림돈도 벌고 집살림도 꾸리며(참 어설피 꾸립니다) 아이랑 옆지기랑 사랑하며 살아가기란 몹시 만만하지 않다고. 이 땅에서 어머니라는 자리에 서서 살아온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며 거룩한가를 새삼 느끼겠다고.
아버지들은 돈도 벌고 살림도 꾸리며 아이도 알뜰히 사랑하는 길을 잘 못 걷습니다. 어머니들은 돈은 돈대로 벌며 살림은 살림대로 꾸리는 가운데 아이는 아이대로 알뜰히 사랑하는 길을 퍽 힘들어 하면서도 슬기롭게 걷곤 합니다. 아이가 아무리 말썽을 피운다 하여도 아이는 아직 잘 모르니 '어른 눈으로 보기에 말썽을 부린다' 할 만합니다.
아이 눈으로 헤아린다면 말썽이 아닌 '아이 삶'입니다. 아이는 어른 눈으로는 말썽처럼 보이는 짓을 하면서 하루하루 배우고 크며 튼튼해집니다. 아이한테는 다그침이나 손찌검이나 꾸지람이 밥이 아니에요. 아이한테는 사랑과 믿음이 밥입니다. 그리고 아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사랑과 믿음이 밥입니다.
한스 피셔 님이 일군 그림책 <피치>는 다른 무엇보다 할머니가 베푸는 고우면서 너르고 따사로운 사랑이 둘레 사람들을 얼마나 즐겁고 기쁘게 보듬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알라딘 서재] http://blog.aladin.co.kr/hbooks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2010.11.12 10:34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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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한스 피셔 지음, 유혜자 옮김,
시공주니어,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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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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