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의 백제시대 고분. 지하철 5호선 방이역 인근에 있다.
김종성
그렇다고 해서 근초고왕의 인생에 시련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대권가도에는 크게 2가지의 장애물이 있었다.
하나는, 큰형과의 경쟁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그가 비류왕의 넷째아들이라고 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그가 둘째아들이라고 했다. 제4왕자건 제2왕자건 간에 큰형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큰형과의 경쟁을 겪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비류왕이 죽은 뒤에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는 계왕(재위 344~346년)과의 경쟁이다. 비류왕이 죽은 뒤에 그 뒤를 이은 것은 그 아들들이 아니라 왕실 일원인 계왕이었다. 이렇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아온 것이 바로 근초고왕이었다. 빼앗긴 왕권을 불과 2년 만에 되찾은 점을 볼 때,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이 대단한 고난과 투쟁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왕자 시절의 근초고왕이 겪은 시련은 큰형과의 경쟁과 계왕과의 투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삶에서, 백제와 중국을 오가며 소금을 짊어지고 다니는 시련 같은 것은 존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한국 고대사에서, 임금이 되기 전에 실제로 소금장수 생활을 해본 인물이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재위 300~331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근초고왕보다 약간 빨리 등극한 임금이다. 고구려 서천왕(재위 270~292년)의 손자인 미천왕은 삼촌인 봉상왕(292~300년)의 박해를 피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미천'한 생활을 하다가 왕이 됐기 때문에 미천왕이라 불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예전에 어느 잡지의 칼럼에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다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미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가벼운 에세이 형식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였던 모양이다.
미천왕이 그렇게 불린 것은 그가 한때 미천해서가 아니라 죽은 뒤에 미천(美川)이라는 벌판에 묻혔기 때문이다. 미천한 출신이라 미천왕이라 했나 싶을 정도의 착각이 들 정도로, 미천왕이야말로 하층민의 삶을 거쳐 고생 끝에 왕위에 오른 전형적인 인물이다.
만약 근초고왕도 그런 하층민의 삶을 거쳐 왕이 되었다면, 역사가들은 그 사실을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사실관계는 숨기거나 왜곡해도, 그런 사실만큼은 가급적 드러내려 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총선거나 지방의원선거가 끝나면 학력이 매우 낮은 당선자들이 입지전적 성공의 사례로 주목을 받는 것처럼, 역사가들도 역사 속 인물의 입지전적 성공에 호기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박정희·김대중·노무현·이명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두고두고 관심거리가 될 만한 인물들이다. 빈농·소작농·서민 출신 혹은 회사원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먼 훗날의 역사책이나 이야기책에서도 계속해서 화제가 될 만한 소재다.
먼 훗날의 역사가들은 '대한민국 시대에는 왜 그처럼 서민 출신 대통령이 많았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들은 "그런데도 그 시대의 서민 대통령들 중에 반(反)서민적 경제정책을 시행한 인물들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 미천왕이나 대한민국 대통령들처럼 서민의 삶을 겪었을 개연성이 매우 희박하다. 후계구도가 정착되지 않은 비류왕 시대의 정치상황 속에서, 그가 후계자인 장남의 지위를 위협한다 하여 궐 밖으로 쫓겨났다고 상상할 만한 개연성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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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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