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잘 드는 작은 베란다가 있어 너무 좋았던 내 집.
이명주
이사를 마쳤다. 한 달에 걸친 느린 작업이었다. 필요한 것은 어머니와 지인의 작업장에 맡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버렸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정리 방식이다.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에 와서 1년을 산 집이다. 그 시간 만큼 우리는 공생했다.
무생물인 공간도 오랜 시간 함께 하면 산 존재와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 이별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마음을 다해 하는 것이 맞다. 짐을 하나씩 빼면서, 벽에 붙인 세계지도와 가족사진을 떼면서,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면서 '그동안 고마웠다. 잘 살았다' 인사했다.
이사나 그에 버금가는 대청소는 짧게는 반년, 못해도 1년에 한번은 하는 게 좋겠다. 어지럽게 널려있거나 아예 잊고 있던 물건들을 여과시켜 제자리에 놓다 보면 삶을 사는 태도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된다.
서른 셋. 보다 가치있는 삶을 위한 새로운 꿈에 도전. 초등학교 운동회 때 100미터 달리기를 앞두고 마음을 조리던 게 생각난다.
12월13일(D-1)
드디어 내일이다. 달리기 시합에서 출발 총성을 기다릴 때처럼 긴장되고 한편으로 멍하다. '어떤 모습으로 달려야지' '몇 등을 해야지' '넘어지면 어쩌나' 따위의 생각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력질주만이 최선임을 온 몸과 맘으로 체감할 뿐이다.
같이 사는 고양이 한 마리는 오전에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별탈없이 끝났고 발정이 나서 포효하던 최근 여러날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고추에 묶인 실밥을 뜯지 않게 하는 것이 최대 난제다. 혈뇨를 보이던 또다른 녀석은 닷새분 약을 먹고 일단은 회복됐다. 녀석들을 한동안 못 본다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모처럼 곤한 잠을 주무시는 어머니께는 많이 송구스럽다. 타지생활하며 그토록 그리워해놓고 함께 산 일 년 동안 웃는 날보다 얼굴 붉히는 날이 많았다. 고향 내려온 직후 사이가 벌어진 아버지와도 결국 화해를 못하고 떠난다. 낯선 세계에 발을 딛는 순간 또다시 가장 간절해질 것을 알면서도 용기내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이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D-DAY 53분 지났다. 내일 이 시각이면 세부공항 근처에서 숙소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때 느낄 감정은 그때가 돼봐야 알겠다. 시간은 흘렀고 흐르고 있으며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출발선을 떠나면 오로지 열심히 달리는 것만이 최선이다. 밤의 장막이 안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