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관도 다른 행정청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항고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이는 국가의 행정조직에 불과한 기관이 직접 당사자가 돼 '처분의 취소 소송'을 낼 수 없다는 기존 판례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판결 확정 여부가 주목된다.
경기도 선거관리위원회가 2007년 8월 김황식 경기도 하남시장을 상대로 주민소환 투표청구를 승인하자, 주민소환 대상인 김 시장은 선관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는데, 법원은 주민소환투표 서명부의 문제를 이유로 투표청구 승인을 취소해 주민소환투표 절차가 중단됐다.
그러자 경기도 선관위는 이 같은 사태를 초래한 선관위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주민소환투표 재청구에 대비하기 위해 주민소환투표 관련 총괄팀장이던 A씨에 대한 문책성 전보인사를 단행했다.
하지만 A씨는 "선관위 사무총장에게 하남시 주민소환투표 과정에서 허위 대리행위 등으로 서명부가 조작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경기도 선관위 소속 직원들이 서명부 심사 과정에서 저지른 위법행위를 제보한 것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민권익위원회에 전보 명령 취소와 신분보장 조치 등을 요구했다.
조사에 나선 권익위원회가 경기도 선관위에 A씨에 대한 징계요구를 취소하고 향후 신분상 불이익처분 및 근무조건상의 차별을 하지 말 것을 통지했으나, 경기도 선관위는 지난해 3월 A씨를 파면했다.
이에 A씨가 권익위원회에 파면처분을 취소하는 신분보장조치를 요구했고, 권익위원회는 지난해 6월 선관위에 파면 징계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고, 신분보장조치 요구와 관련한 권익위원회의 조사에 불응한 경기도 선관위 및 직원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의결했다.
그러자 선관위원장은 "A씨의 신고는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수사결과 국민권익위원회법에 규정하는 부패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됐을 뿐만 아니라, A씨에 대해 중징계 해야 할 정당한 사유가 있으므로 신고가 부패행위에 해당함을 전제로 한 권익위의 처분은 위법하다"며 권익위원회의 의결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고, 1심은 "선관위원장은 국가의 산하기관에 불과할 뿐 항고소송의 원고 자격이 없다"며 각하했다.
이 사건은 국가기관이 다른 국가기관을 상대로 항고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행정소송법상 항고소송은 행정청의 '처분 등'이나 부작위에 대해 제기하는 소송이고, 대표적인 항고소송은 '처분 등'의 취소를 구하는 취소소송이다.
항고소송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민사소송과 마찬가지로 자연인과 법인 등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일반적 능력인 당사자능력이 있어야 하고, 특정한 소송에서 소를 제기해 본안판결을 받기에 적합한 자격인 원고적격을 갖춰야 하므로, 국가의 행정조직에 불과한 국가기관이 직접 당사자가 돼 소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서울고법 제9행정부(재판장 박병대 부장판사)는 최근 경기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국민권익위원회를 상대로 낸 불이익처분 원상회복 등 요구처분취소 청구소송(2009누38963)에서 1심을 깨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7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먼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고, 법원은 헌법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한 일체의 법률상의 쟁송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므로, 권리의무의 존부에 대해 다툼이 있는 경우에는 그 권리의무의 주체는 최종적으로 법원의 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가 있고 법원도 그 심판청구를 받아들일 책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국가기관이 다른 국가기관에 대해 한 조치라도 그것이 일반 국민에 내린 행정처분 등과 동등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권리와 의무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조치의 위법성을 제거할 다른 수단이 없는 경우에는 법원에 소송을 내 적법성을 다툴 당사자 능력과 적격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선관위 직원 A씨에게 불이익을 주지 못하게 한 의결을 선관위가 수용하지 않으면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권익위법)'에 따라 기관장이 처벌받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권익위의 결정은 선관위원장의 권리와 의무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항고소송의 대상인 행정처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권익위원회법상 처분의 상대방인 소속기관의 장이 권익위 조치요구에 불응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권익위는 이를 근거로 경기도 선관위 직원이 A씨에 대한 신분보장조치 요구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과태료 부과를 의결한 바 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처분은 국무총리 산하 기관이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관위 산하기관에 대한 처분으로서 정부조직 내에서 그 처분의 당부에 대한 심사 및 조정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고, 또한 국가기관으로서의 원고가 소속 직원에 대한 징계권이 제한되고 나아가 형사처벌 등 중대한 권익 침해가 초래될 수 있는 처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취소를 구할 다른 법적 수단도 없다"며 "이를 종합하면 원고가 피고를 상대로 취소를 구하는 항고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위와 같은 권한의 제약과 법적 지위의 불안을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하고 적절한 수단이며,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판단하는 것이 법률상의 쟁송에 대한 심판을 할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헌법의 명령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A씨가 부패신고를 했으나, 선관위 직원들이 서명부 심사과정에서 일부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이는 단순한 부주의나 직무소홀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부패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피고는 선관위 직원들이 부패행위를 했다는 전제에서 이 사건 처분을 했으니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2010.12.27 18:21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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