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 책 표지
안건모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쓴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경희대에서 4천 명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영어로 강의를 하고 큰 화면 밑에 자막이 뜨는 방식이었다. 그 자막은 오타가 많아 정확히 알아 볼 수가 없었는데 다른 관중은 그 자막이 필요 없었다. 거의 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유창한 영어로 마이클 샌델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자막에 한글 뜨는 게 늦어 빨리 이해는 되지 않았는데 별 중요한 내용이 없다는 것만 짐작했다.
갈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 한국말로 물었다. "이 시대에 왜 정의가 필요합니까?" 그 말이 나오자마자 "와!" 하고 학생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마이클 샌델이 어이가 없어 잠깐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 거기 온 학생들은 사회 정의가 필요 없고 오로지 스펙만 쌓아 이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만 하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었다. 어이없는 그 질문을 듣고는 강연장을 나와 버렸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70만 부가 팔렸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라서 그럴까? 세상이 어려울수록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들이 많아질까? 이홍 리더스북 대표는 "이 가운데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읽는 순수 독자가 다수겠지만 베스트셀러를 무조건 추종하는 소비층도 상당히 유입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도 남이 사니까 그냥 산 사람들이 많았다. 읽기나 했을까?
우리나라 경제신문사에서 마이클 샌델의 책을 출판할 자격이 있는 걸까그런데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라는 책이 지난 10월에 또 출간됐다. 책을 낸 출판사를 보니 참 뜬금없다. 천민자본주의를 신봉하는 <한국경제신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뜨니까 바람을 타고 낸 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마이클 샌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수를 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정의와 도덕은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왜 도덕인가?> 1부에 나온 '도덕이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심한 빈부격차는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의 주정부가 하는 복권사업의 사례를 들면서, 운만 조금 따라 주면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끝없는 노동의 악순환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은, 헛된 희망을 퍼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경제신문사들은 그런 책을 낼 자격이 없다.
책 내용은 배울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책 차례에 나온 질문에 정확한 답을 듣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모두 3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 도덕이란 무엇인가, 2장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 3장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 이렇게 세 장이다. 각 장에는 그 제목에 맞는 부제들이 있고, 그 부제들 밑에는 사례들이 나열돼 있다.
이를테면 1장 부제 '정치적 도덕'에서 '정치인의 거짓말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의 대답은? 어느 장에서 보듯 똑 부러지는 답이 없다. 정당한 목적을 위해, 또는 부당한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고 두루뭉술하게 답한다.
제3부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의 부제 '성장과 분배 정의의 실현'에서도 마이클 샌델의 생각은 명확하지 않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은 '경제성장과 분배 정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과세정책과 우선지출 등의 논의'를 했는데 그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정책에서 그 무엇보다 국부의 증가와 분배를 중시해야 한다는 가정을 반영한다'고만 말한다. 그렇다면 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 분배를 중시해야 한다는 말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런 논리는 우리나라 수구세력들이 늘 써 먹는 주장 아닌가.
본래 이 책에 나온 글들은 <애틀랜틱먼슬리>, <뉴퍼블릭>, <뉴욕타임스> 같은 지면에 실렸던 글이라고 한다. 독자가 학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일반 독자까지 읽을 필요는 없겠다. '도덕'을 말하는데 미국의 사례까지 우리가 알아가면서 배울 필요가 있을까?
도덕을 깨달으려면 우리나라 사례로만 충분하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정당한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용역깡패와 경찰들을 동원해 폭력을 휘두르는 우리나라를 정부를 보면, '정의'와 '도덕'이 무엇인지는 자연스럽게 깨닫지 않을까.
이들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 중 단 한 가지라도 실천할 수 있을까?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8월 20일 경희대에서 강의가 있기 전날 오후 아산정책연구원 강당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회에는 약 1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주한 포르투갈대사, 주한 이스라엘대사, 주한 EU대사, 교수, 국회의원, 원희룡 한나라당 사무총장, 정몽준 아산정책연구원 명예이사장 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주한대사, 아이들 무상급식까지 예산을 날치기하는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원희룡, 몇조 원 재산을 갖고 있고, 국회의원 중에 가장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현대 대그룹 주주이자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인 정몽준. 정의란 개코도 없는 자들이 모여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들었단다.
이들이 그 강연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들은 그 강연에서 배운 그 정의를 단 한 가지라도 실천을 할까? 아니, 그러기는커녕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경희대 강연장에서 물었던 학생처럼 '이 시대에 왜 정의가 필요합니까?' 하지 않았을까? <왜 도덕인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