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방 안에 내 것이라고 놔둔 아담한 나무 책상이 정겹다.
이명주
나의 22살 룸메이트는 이곳에 와서 또래 한국인 남자와 연애 중이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거의 매일 외출한다. 그리고 새벽에 들어온다. 술은 다반사요, 지난주 금요일(18일) 성탄절 파티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건넨 디카 안엔 연인과의 은밀한 순간이 포착돼있었다. 깜빡한 건지 개의치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본인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 못지 않게 뻐적지근한 이십대를 보낸 사람으로서. 서른이 넘은 지금도 계절마다 달리 부는 바람 한 점에 가슴이 요동친다. 하지만 방탕한 삶은 언제고 그 주인에 책임을 묻는다. 대부분 까맣게 잊고 살 때쯤 '인생이 장난이냐?' 하는 식으로 발목을 잡는다.
사나운 한 시절을 보내고, 스스로 번 돈으로 새로이 꿈을 좇으니 이제야 무엇이 '진짜'인 지 보이는 듯도 하다. 어제오늘 여러번 '나이들어 좋은 것도 많다' 생각했다.
12월25일최근 몇 년 새 이렇게 아파본 적이 있나 싶다. 두통과 오한을 잊으려 침대 위에서 글을 쓴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새해맞이와 비슷했다. 자정을 앞둔 성탄절 전야, 여기저기서 "10, 9, 8, 7…1" 카운트다운 함성이 울렸다. 대부분 가게는 밤 10시 전 영업을 마쳤다. 특히 솔로, 커플 할 것 없이 성탄절은 당연히 가족과 함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오줌빨이 얼 만큼 추운 가운데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맞은 한국과 반대로 현지엔 기습성 폭우가 더위를 식혔다. 덕분에 어학원 동기들과 치킨과 맥주를 찾아 나섰다 비를 흠뻑 맞았다. 어렵사리 시내에서 문을 연 가게를 찾았지만 그마나도 정해진 시각보다 빨리 마친다 해서 시킨 음식들을 빛의 속도로 섭취했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 규정상 음주 반입이 불가하지만 순전히 어린 배치메이트들에게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맥주 대병 하나를 숨겨 들어왔다. 경호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결국 무사통과했다. 하지만 이성간 합숙금지 규정은 존중해 여자들끼리만 농밀한 시간을 가졌다.
이국에서 한여름밤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조촐하게 끝났다. 하지만 혼자만의 사나운 밤이 기다렸다. 샤워할 때부터 살갗이 따끔따끔 아프고 열이 솟더니 급기야 참기 어려운 두통과 오한으로 발전했다. 술 먹은 속에 약을 먹을 순 없어 새벽까지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