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카 한국사>.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서 출토된 신라 여인상.
이끌리오
고구려의 결혼문화만 검소했던 게 아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수서> '동이열전'의 신라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혼인의 의식이라고는 단지 음주와 식사가 있을 뿐이다. (비용의) 경중은 빈부 수준에 맞춘다."이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연회를 베푸는 것으로써 결혼예물을 대신했다. 물론 생활수준에 따라 연회의 규모가 다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처럼 이것저것 과도한 예물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는 않았다. 신라인들도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진하게' 한 잔 하는 수준에서 만족했던 것이다.
한편, 백제나 가야의 혼인예물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수서>에서는 고구려·신라의 풍속만 소개했을 뿐이다. 수나라가 있었을 당시에, 가야는 없었고 고구려·백제·신라만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달리 비옥한 농토를 갖고 있었고 또 신라와 달리 대중국·대일 무역의 기회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고구려·신라보다 생활수준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인들은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는 수준 혹은 한 차례 연회를 여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검소한 결혼예물에 만족했으리라고 추정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다.
만약 백제인들이 고구려·신라와 크게 대조되는 과도한 예물문화를 갖고 있었다면, <수서> 편찬자들이 고구려·신라의 예물문화를 소개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백제의 예물문화를 소개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한민족의 예물문화가 전반적으로 검소한 가운데에 고구려·신라의 경우가 특히 모범적이기 때문에 두 나라의 사정만 소개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위에서 소개한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편에 남녀상열(男女相悅)이란 표현이 있었다. 이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그다지 건전하지 않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이 고려시대의 대중가요를 가리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폄하한 탓에, 남녀상열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 고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녀상열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고구려·신라인들은 남녀상열을 최고의 결혼예물로 생각했다. 둘이 좋아 죽으면 그뿐이지 무슨 예물을 주고받느냐며, 그렇지만 그냥 보내기는 좀 섭섭하므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혹은 밥과 술로 성의나 표시하자는 게 그들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이 아주 인상적이고 모범적이었기에 중국 역사서에까지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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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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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신라 결혼예물은 단 두가지, 더하면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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