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마지막 날, 한 방송사의 가요축제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초등학생 아들 녀석이 건넨 질문이다. 아이 앞에서 맞추는 시늉은 했지만, 솔직히 멤버는커녕 요즘 아이돌 그룹의 이름조차 잘 모른다. 아들로부터 학교 선생님이 그것도 모르냐고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명색이 교사로서 아이들과 그런대로 교감하고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순식간에 무색해졌다. 하긴 어떤 동료 교사는 무대에서 아이돌 그룹의 춤을 흉내 내어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하고, 얼마 전 어느 중견 남자 탤런트는 걸 그룹 소녀시대의 멤버 9명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알고 있다며 뽐내기도 했다.
아이돌 그룹의 노래와 춤은 기성세대가 요즘 아이들과 소통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다. 아이들이 동요를 듣지 않게 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국악은커녕 클래식으로 불리는 고전음악조차 학교 내신용으로 잠깐 접해볼 뿐이니, 아이들과 아이돌 그룹을 뺀 음악 얘기는 그저 '공자왈 맹자왈'일 뿐이다.
거칠게 말해서, 지금도 아이들이 배우는 음악교과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동요와 고전음악 등은 아이돌 그룹의 노래와 춤에 밀려나 어느새 하품만 나오게 하는 존재가 돼버렸다. 더욱이 음악이 입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이 되다보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고 급기야는 헨델과 브람스, 차이콥스키가 축구선수 이름 아니냐고 반문하는 아이가 나올 정도가 됐다.
현란한 조명과 음악에 취해서인지 한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가히 그들의 음악은 화려하고 자극적이다. 한 번만 들어도 그들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음이 단순하고 중독성이 강하다. 신체 노출도 꺼리지 않는데다 형형색색 조명이 휘감으면서 그들의 노래와 춤사위는 더욱 화려해지고 시청자들은 과연 TV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아들 녀석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이미 반쯤 풀렸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정확할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음악을 단지 귀로만 듣지 않는다. 외려 눈으로 보는 걸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 노래를 하는 '가수'라지만 그들이 립싱크를 하든 말든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로지 그들이 보여주는 '비주얼'에 열광한다. 그래서일까. '듣는' 것보다는 '보는' 노래다 보니 가사나 곡보다 외려 무대와 춤으로 기억되는 노래가 더 많은 게 현실이다.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대형 가요 프로그램이었지만 '장르'는 동일했다. 출연한 아이돌 그룹의 '성별'만 달라졌을 뿐, 남녀 불문하고 짙은 화장에 선정적인 옷차림, 그리고 자극적인 춤사위는 쉬이 구별되지 않았다. 무대 위 출연자들만큼이나 피켓을 흔들고 괴성을 지르는 관객들도 천편일률적이었다. 그 넓은 관객석은 온통 10대들 차지였다.
아무리 10대가 음반 시장은 물론, 가요 프로그램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이라지만, 다양한 취향에 대한 배려도,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주구장창 '같은' 노래만 듣고 봐야한다는 건 분명 지나치다. 아닌 게 아니라, 아들 녀석의 등쌀에 연말의 사흘 밤을 공중파 방송사 세 곳이 '순번대로' 진행한 가요 프로그램만 시청했다.
출연자도 노래도 다 같았으니 똑같은 내용의 방송을 두 번이나 더 본 셈이다. 하긴 가요 프로그램뿐 아니라 연기자 시상 프로그램도 세 곳이 방송 날짜만 다를 뿐 동일하니, 연말을 TV와 함께 보내는 이들이라면 식상하게 여길 게 뻔하다. 이쯤 되면 '전파 낭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잔잔한 통기타 소리는 자장가에 가깝다
그런데, 이러한 공중파 방송사들의 가요 프로그램 편성은 주고객층인 10대를 열광하게 만들지언정 그들의 음악적 취향은 물론 행동과 옷차림마저도 획일화시키고 있다. TV를 통해 아이돌 그룹만 봐온 아이들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대해 접할 기회조차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기 십상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나라 10대들의 음악적 취향은 동일하다.
아울러 아이들 사이 외모에 있어서 '간지' 또한 단연 아이돌 그룹의 옷차림이 기준이다. TV에서 그들이 걸치고 나온 옷이나 신발은 불과 하루 이틀 만에 아이들 사이의 '패션 코드'로 자리매김 된다. 헤어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은 물론,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예명을 본떠 스스로의 별명을 붙이는가 하면, 공부 잘 하는 아이보다 춤 잘 추는 아이가 '대우' 받는다.
중고등학교 축제를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한마디로 공중파 방송사들의 가요 프로그램을 '소박하게' 축소했다고 보면 정확하다. 마술이나 개그 한두 꼭지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아이돌 그룹의 '이미테이션'이다. 요즘 들어선 학교 축제에서조차 립싱크가 대세라 그들과 똑같이 옷 맞춰 입고 춤추는 것이 전부다.
깜짝 쇼로 교사들이 애써 무대에 올라도 아예 '망가지거나', 아이들의 음악적 정서에 부합하는 공연이 아니면 철저히 무시당한다. 혹 나름 맹연습을 해서 비틀즈나 아바, 비지스 따위를 연주한다고 해도 스스로 뿌듯해 할지언정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다. 공연 중간에 밖에 나가거나 웅성거리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개 큰 행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끝마무리를 할 때 제격인 사물놀이조차도 전통적인 우리 가락으로는 요즘 아이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휘모리니 굿거리니 하는 용어는커녕 흥과 가락 자체를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물놀이패가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 그룹의 곡을 흉내내기 일쑤고, 이러다간 북이나 꽹과리를 든 한복 차림에 '웨이브'를 뽐내야 할 판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 축제에 성악이나 피아노, 통기타 연주는 흔하디흔했고, 종종 대규모 합창과 라틴 댄스가 공연되곤 했으며, 심지어 판소리 한 대목도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꼭지들은 시나브로 사라졌고, 지금은 이런 재능을 무대 위에서 뽐내려는 아이조차 많지 않다. 관객석에서 박수치며 호응해주는 친구들이 많지 않은 탓이다.
웬만한 자극에는 눈 깜짝도 하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게 잔잔한 통기타 소리는 열광적인 무대에 잠시 쉬라는, 차라리 '자장가'다. 하물며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성악이나 판소리는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아이들의 감성을 풍요롭게 해야 할 음악이 되레 그들의 생각과 행동조차 획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교육방송의 애니메이션이나 다큐멘터리를 더 좋아하지만, 초등학생 아들이 이런 가요 프로그램에 빠져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유치원 때 빼고는 그의 입에서 동요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외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트로트와 아이돌 그룹을 달달 외고 있다. 요즘 아이들 다 그렇다고 부모로서 무작정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방송사 가요 프로그램이 다양했으면 좋겠다
새해 첫날, 우리 가족의 새해 다짐을 적었다. 아내와 두 아이 각각의 다짐과는 별도로, 우리 가족이 공통으로 지키려는 내용을 따로 정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내와 난 TV 시청 시간을 대폭 줄이자는 의견을 냈다. 여가를 TV에 의존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는 취지인데, 철부지 두 아이도 그러겠노라며 손가락을 걸었다.
부디 공중파 방송사들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재즈와 포크 음악도 만나고, 때로는 하드록이나 헤비메탈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라 다양한 뮤지션들이 나와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진 음악을 펼쳐 보이는 장면을 TV를 통해 만나고 싶다. 똑같은 것만 보여주는 TV라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안 가 집에서 치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들 녀석은 혼을 놓은 채 연신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지만, 연말연시 재탕 삼탕의 가요 프로그램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뉴스조차 쇼 프로그램화하고 있다는 우려 섞인 최근의 보도를 떠올렸다. 하긴 뉴스 앵커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아나운서들이 '개인기'를 뽐내며 개그 무대에 서는 '통섭'이 이미 대세가 됐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건 따로 있다. 가요계가 아이돌 그룹에 접수된 것처럼 방송 전체가 예능 프로그램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할 날도 그다지 머지않아 보이는 현실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TV 프로그램을 다양화하고 수준을 높여달라고 요구하느니 아예 TV를 처분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아들! 아빠는 조용필과 김광석, 장기하의 노래가 훨씬 더 좋던데. TV 끄고 아빠랑 지금 같이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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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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