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겨울 심학산 아래 부대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새로 지급한 방한복을 입고 좋아했던 소대원들. 앞줄 오른쪽이 필자, 이름이 기억나는 소대원은 김길용(부산), 김홍기(충북대), 최상신(서울), 임영규(안동와룡), 김학수(서울), 조만규(경남) 등이다. 이 가운데 기혼자가 셋이었다.
박도
영하 10~20도 강추위에 울고 있던 근무자들그 당시 나는 소대장으로 부대원(중대원)들의 잠복근무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순찰 근무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둑으로 오르내리며 부대원들의 경계근무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강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순찰을 한 번 돌고나면 온몸이 동태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소대원들의 고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나의 고생은 그들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특히 소한에서부터 대한, 입춘까지는 밤마다 강물이 조수에 따라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여 얼음 깨어지는 소리가 '우두둑' 밤새 울렸다. 근무자들은 영하 10~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 강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그들은 뚜껑도 없는 무개 호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 순찰 중 근무자의 얼굴을 전짓불로 비춰보면 그들은 너무 추워 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야만의 시절이었다. 상급부대에서는 잠복호에 덮개가 있으면 근무자가 잠을 자 경계가 소홀하다고 뚜껑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부대는 겨울을 그렇게 난 뒤 그 이듬해 가을까지 꼬박 12개월 동안 심학산 바로 밑 부대에 근무하면서 그 지역 경계 임무를 맡았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심학산 정상에 오르면 북한이 빤히 보였다. 포대경으로 북한을 바라보면 거기서도 모내기철에는 사람들이 논에서 모를 내고, 가을이면 추수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같은 배달겨레끼리 이게 뭔 짓거리인가 하고. 그때 남북 군인들은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고, 비방방송을 하고, 날마다 삐라를 날려 보냈다. 우리 부대가 주간에 하는 일은 그 삐라들을 수거하는 일이었다.
그때 우리 부대원들은 어찌나 고생이 심했든지 그들은 밤새 근무지에서 돌아오면 이를 갈았다.
"장가가서 아들 낳으면 그 자리에서 팍 엎어버릴 겁니다."어떤 부대원은 경계근무를 견디지 못해 자해로 불명예제대를 한 친구도 있었다. 어느 가을에는 비가 몹시 내리는데 한밤중에 비상이 걸렸다. 강물 위에 이상한 물체가 꿈틀거리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남짓 사격 끝에 강가에 널브러진 물체를 확인하니까 송아지였다. 아마도 홍수로 임진강에서 떠내려 오던 송아지가 바다의 조수를 만나 한강 상류로 역류하다가 총알 세례를 된통 맞은 거였다.
더욱 견고해진 DMZ 철조망... 서로 총구 겨눈 자손들이 가엾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