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출구의 칠성바위바위마다 사람의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특이한 유적이다.
정만진
그러나 지금 대구 시내에서 제대로 된 고인돌을 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대구의 향기>에서 "시가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대부분의 지석묘가 없어지고 말았다"라는 대목을 보는 마음은 바늘에 찔린 듯이 아프다. <대구시사>에 나오는 "(대구의 그 많던 고인돌들이)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를 읽는 눈에는 저절로 물기가 감돈다. 도대체 그 많던 고인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식민지 시대 이 땅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기네 정원을 꾸미는 데에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함부로 가져다 썼다. 그 일을 두고 <대구시사> 103쪽은 "1927년 첫 지석묘 발굴 조사가 있었을 때에는 이미 상당수의 지석묘 상석이 일본인들의 정원석으로 많이 이용되어 원위치에서 이동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는 광복 전까지만 해도 거석 유적들이 도심 곳곳에 즐비해 '고인돌의 도시'라고 불렸다(<영남일보> 2010년 10월 9일, 박진관 기자)"는 지적을 보면, 허망하게 사라져간 대구 지역 고인돌들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없앴다고 보아야 한다. <대구시사>가 "(일본인들의 행위) 후에도 시가지의 확장으로 상석의 대부분이 제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구 시역의 확장으로 진천천 유역, 욱수천 유역, 율하천 유역의 반야월 지역 지석묘군마저 최근의 갑작스러운 경제성장에 따르는 대규모 공단지 조성, 시가지 확장 등 국토개발로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면서 우리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것은 겸허하고 옳은 역사가의 자세이다.
신천 유역인 파동, 상동, 중동, 이천동과 진천천 유역인 상인동, 월성동, 진천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대구의 그 많던 고인돌들이 우리의 몰역사적인 개발 일변도 의식 때문에 무참하게 훼손되고 만 것이다. 고창보다도 더 많아 무려 3천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는 대구, 만약 지금도 그것들이 제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볼 게 없다'는 대구의 오명은 정말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