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범 아주대 의대 산업의학교실 교수.
박재범 교수 제공
자동차 내장재 생산과정에서 쓰이는 TDI와 MDI라는 화학물질이 있다. 지방의 모 기업 노동자들이 치료해도 잘 낫지 않고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호흡기 증상으로 인근의 호흡기내과를 방문했다.
이 병원의 산업의학 전문의는 20명 이상이 같은 질환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업무 관련 원인 물질이 있는지를 의심했다. 그래서 해당 사업장을 방문한 이 전문의는 회사 책임자와 노조 대표에게 작업자들의 증상과 관련한 원인 규명과 예방을 위해 작업환경측정을 포함한 역학조사를 권유하였다. 이에 회사 측에서는 추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후 2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회사가 노조 대표를 매수하여 노조를 해체하고 유야무야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작업 관련 증상이 지속되면서 이들은 계속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사실이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알려져서 역학조사가 실시됐고, 약 1년간의 역학조사 결과 모두 직업성에서 비롯된 천식으로 인정받았다.
[사례 4] 유기용제에 의한 피부질환(접촉성 피부염) 지방 모 기업의 한 현장 노동자가 손에 생긴 피부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인근 병원의 피부과에 갔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이것이 이 노동자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 확진을 위하여 산업의학과로 환자를 보냈다.
산업의학과를 찾은 해당 환자는 부서 전환을 하여 손의 피부증상은 호전되고 있다고 하였으며, 단지 자신의 이전 부서에서 후임자가 자신이 하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이 환자는 업무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작업장의 노출가능물질에 대한 역학조사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이 노동자가 근무하던 회사는 직업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이에 관한 조사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이 때문에 해당 환자 질환의 직업 관련성 규명 작업은 더 진행되지 못했으며, 환자도 산업의학과 진료를 거절하였다.
[사례 5] 다중화학물질민감증(MCS) 4년 전부터 한복집을 운영해온 여성 김모씨(53세)는 1년 전부터 몸에 이상을 느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두통과 어지러움 증상이 발생했다. 그러더니 기침, 가래, 호흡 곤란 등 호흡기 증상 외에도 말과 손동작이 둔해졌고 손 떨림 증상도 나타났다. 3개월 전부터는 걸을 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증상도 나타났다. 또 운전할 때에는 쉽게 방향을 잃었다. 이 외에도 메스꺼움, 구토 같은 소화기 증상도 나타났다.
김씨는 평소 별다른 증상 없이 건강한 편이었다. 8년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완쾌되었고 갑상선 호르몬 수치도 정상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김씨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1년 전 한복가게가 있던 건물 2층에 전자회사가 입주한 후부터다. 전자회사는 큰 소음을 발생시켰고, 국소배기 장치 배출구를 1층 한복집 뒷문에 설치하였다. 손님들은 가게에서 가스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였고, 3층 거주 주민들도 김씨와 비슷한 증상으로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김씨가 배기구를 다른 곳으로 치워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의 증상은 1년 동안 점차 악화되어 한 달 전부터는 한복집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휴일이나 휴가 기간 동안 출근하지 않으면 증상이 호전되었지만, 출근하면 여지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후 김씨는 여러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받았다. 혈중 중금속 검사, 뇌 CT, MRI 검사, 각종 혈액 검사, 모발 검사, 호르몬 검사, 면역 검사, 대장내시경 검사, 위 검사 등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김씨는 위궤양, 만성 인후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증상의 호전은 없는 상태이다. 김씨는 한 대학병원 산업의학과에서 다중화학물질민감증(Multiple Chemical Sensitivity, MCS)이란 진단을 받았다.
다중화학물질민감증이란 중년 여성들 사이에 흔하며, 다양한 종류의 낮은 농도의 환경물질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여러 가지 증상의 복합군을 말한다. 보통 후천적이고, 비교적 분명한 사건(환경물질에 노출, 유기용제 중독, 호흡기 계통 자극, 농약 중독 등) 이후 발생하며, 김씨처럼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작업장 환경 기준보다 매우 낮은 농도의 화학물질로도 증상이 악화될 수 있으며, 어떤 생리적 기능 검사로도 증상을 설명하기 어려워 조기에 진단하기 어렵다.
일단 증상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경우 원인물질이 제거되어도 완치가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환경물질 노출 정도에 따라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면서 증상이 영구적으로 지속된다. 다행인 것은 병이 지속되어도 생리적 변화나 합병증이 발생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여러 신체장애 때문에 직업을 잃거나, 심한 경우 주유소의 휘발유 냄새에도 반응하여 사회적 활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완치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 사회적, 개인적, 직업적 기능을 도달 가능한 최대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현실적인 치료 목표가 된다.
이를 위하여 환자뿐 아니라 가족, 직장에도 질환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되도록 화학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생활환경을 변화시키는 노력도 중요하다. 정신적인 측면도 병의 발생과 악화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주위의 지지가 필요하며 직업 재활 등 경제적 도움도 필요하다.
김씨의 경우 발병 당시 개인사업자이며, 발병원인이 작업장 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어서 산재보상보험의 적용이 되지 않았다. 김씨는 현재 전자회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