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 백합의 뼈>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뒤를 잊는 '삼월시리즈'의 세번째 편이다.
전편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무대는 기이한 기숙학교였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미즈노 리세는 괴상한 경험을 뒤로 하고 학교를 떠난다. 그 이후에 미즈노 리세는 어디로 갔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이 <황혼녘 백합의 뼈>다. 기숙학교를 나온 미즈노 리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몇 년 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귀국한 이유는 얼마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소유한 '백합장'이라는 2층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저택 정원에 잔뜩 피어 있는 백합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유언에는 '내가 죽더라도 미즈노 리세가 반 년 이상 이곳에 살기 전에는 절대 집을 처분해서는 안된다'라는 이상한 조항이 있다.
언덕에 자리잡은 고풍스러운 저택
이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 미즈노 리세는 영국 유학 도중에 일본으로 돌아온다. 백합장에는 리세의 고모뻘인 자매가 살고 있다. 리세도 백합장에 살면서 인근 고등학교에 편입하고 일반적인 고등학생과 같은 평범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한다. 이유는 할머니가 남긴 백합장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 집을 가리켜서 '마녀의 집'이라고 수근거린다. 리세는 자신의 친구를 통해서 그 이유를 듣게 된다.
할머니네 집안에 대대로 남자복이 없었단다. 할머니도, 시집간 딸들도 모두 남편이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자매며 친척도 어쩐 일인지 남자들은 모두 단명해 왔다. 이른바 여계(女系)가족이라고 할만하다. 집안의 내력에 관한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주위 사람들이 백합장을 꺼리는 것이다.
소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백합장 자체도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이 집을 처음으로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백합장 2층은 같은 크기의 방 여러 개로 나누어 놓았을 뿐, 서재나 취미활동을 위한 공간은 전혀 없다. 마치 무슨 숙박시설처럼. 백합장의 주변에서는 작은 동물들이 끊임없이 죽어나간다. 할머니는 예전에 '백합장 2층에는 요정이 돌아다닌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런 백합장에 리세의 사촌오빠 두 명이 차례대로 찾아온다. 며칠 후가 할머니의 기일이라서 제사를 위해 도착한 것이다. 이제 무대와 배우가 모두 마련되었다.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였지만 분위기는 어색하고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빈정대기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집에 관한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잔뜩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왜 정원에 백합을 가득 심어두었을까
온다 리쿠의 작품에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작품 속에 공존하고 있는, 또는 뒤섞여 있는 밝음과 어두움 때문이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와 이번 작품 모두 학생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농담도 하고 깔깔거리며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지만, 한꺼풀 벗기고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자신만의 어두움을 가지고 있다.
하긴 모든 사람들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것도 당연할 것이다. 리세의 경우는 이런 어두움이 대대로 이어져오기 때문에 문제다. 리세는 생각한다. 세상에 떠다니는 악의 존속은 인간의 필연이라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있을 뿐이라고.
이 작품에는 농후한 백합의 향이 떠돈다. 모든 것의 테두리를 녹이는 석양의 바닥에서, 조금씩 탁한 색으로 가라앉아가는 정원의 풍경에서, 은은하지만 강한 향이 맴돈다. 한 번 몸에 배인 향기는 어디를 가든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미즈노 리세는 작품의 마지막에 다시 영국으로 떠나지만 백합장에서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진한 향기 역시.
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2007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