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음식과 맛을 다룬 미각의제국은 한국인의 음식박물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따비
"그러나 그 강력한 고소함은 음식 맛을 죽이기도 한다. 슴슴한 고사리나물에, 달콤한 콩나물무침에, 쌉쌀한 도라지나물에, 시원한 무나물에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트리면 후각으로 느끼는 맛은 거의 같아진다. 쇠고기든 돼지고기든 불에 구워 참기름 찍으면 맛이 똑같아진다. 이런 까닭에 참기름은 한국 음식에서 폭군이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독재자이다. 참기름이 한국 음식 맛의 다양성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p.36 참기름
"나 또한 고추 중독자이기는 하지만, 외식업체들이 이 통증의 감각물을 남용하는 버릇으로 해서 노이로제에 걸려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매운 음식이란 그 음식 전체가 매운 성분으로 처발라진다는 특징이 있다.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음식 전체에 풀어 덩어리든 액체든 똑같은 강도의 통증이 느껴지도록 조리한다." p.28 고추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과 그것을 느끼는 맛에 대해 다룬 책이다. 음식의 지닌 아름다운 맛과 화려한 조리법을 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이 주체성을 잃은 채 갖고 있던 맛에 대한 환상을 담담한 필체로 정리한다.
저자 황교익은 <전원생활> 편집장 등을 거치며 전국의 음식을 섭렵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음식에 관한 저서와 각종 매체에 맛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맛집 책이라면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식당 안내 전화번호도 없다. 그런 깐깐함으로 만들어진 맛 개념서가 바로 <미각의 제국>이다.
맛 개념 잡고 자신의 맛 추구하며 '미각의 제국' 만들기 푸아그라나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 따위를 설명하지 않고 국수, 김치찌개, 삼겹살, 비빔밥 등 우리가 흔히 즐기는 음식과 식품을 두고 그 맛에 대한 기준을 잡도록 돕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익숙한 것에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는다. 가정 밥상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고추장과 된장, 김치마저 공장의 대량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공산품을 소비하고 있음에도 그대로 따라갈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미덕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것들, 알고 있지만 무시하고 지나는 것들을 생각해 보도록 돕는다. 우리는 적당히 맵고 적당히 달고 적당히 고소한 맛에 길들여지지 않았을까? 거대 자본이 만들어내는 기준으로 인해 화학조미료로 '고향의 맛'을 내고, 외식업체들의 천편일률적인 맛 기준에 따라가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맛은 재료와 조리법으로만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여름에는 입맛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책을 열어보면 젖, 아내, 열, 가을 등에 대한 관념적인 맛의 환경을 다루는데 이 또한 천천히 읽으며 음미할 가치가 있다.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먹이는 음식만큼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일 것이다. 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이런 애착은 어머니가 부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바로 곁에서 매일 먹을 때는 모른다는 말이다. 아내의 음식도 그럴 것이다." p.94 아내
회식 자리에서 끊임없이 구워지는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보면 그 맛 뒤의 축산 환경을 생각해보자. 물론 타박을 들을만한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음식과 식재료의 근원을 찾는 일은 우리가 거대자본이 제시하는 '좋은 먹거리', '바른 먹거리'를 소비하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저자는 맛의 개념을 잡고 자신의 맛을 추구해나가는 일을 미각의 제국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옳은 맛을 찾아가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단으로 비춰진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미각의 제국을 구축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옳은 맛을 찾아가는 미각 레지스탕스이기도 하다.
음식의 맛을 느끼면서 그 맛의 근원을 찾아가보자. 재즈를 계속 듣다보면 처음 들을 때 들리지 않던 콘트라베이스 소리가 둔중하면서 흥겨운 소리를 내듯이 우리가 느끼는 맛의 세계도 더 크게 열릴 것이다. 그 큰 맛의 세상을 탐험하는 데 있어 <미각의 제국>은 좋은 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