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능으로 구성된 신라오릉. 이 중 하나가 남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북 경주시 탑동 67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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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시점을 확정할 수 없는 신라 초기에, 강력한 이방인 집단이 신라 해안에 출현했다. 오늘날의 러시아 캄차카반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석탈해 집단이 가야 왕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에 신라 해안에 나타난 것이다. 석탈해의 도래 시점에 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있지만, 여기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우선시하기로 하겠다.
출현 당시의 석탈해 집단이 강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야왕 김수로가 석탈해를 추격하기 위해 500척의 함선을 동원했다는 <가락국기>의 기록 때문이다. 500척의 군함을 동원하지 않고는 추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석탈해 역시 상당 규모의 함선을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또 석탈해 집단이 가야 왕권에 도전했다는 것은 그만한 역량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집단의 출현으로 인해 신라 민간에 석탈해 신화가 생긴 것은, 신라인들의 뇌리에 강한 각인을 남길 만큼의 강력함을 석탈해 집단이 보여주었음을 반영한다.
이처럼 강력한 외래세력이 도래했으니, 신라인들이 느꼈을 정신적 공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정신적 공황이 더욱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신라가 석탈해 집단을 내쫓을 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야는 군사력을 동원해 석탈해 집단을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에 비해 신라는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신라의 국력이 이 집단을 내쫓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외래세력의 도래로 인해, 경우에 따라서는 신라가 붕괴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남해왕은 석탈해 집단을 신라에 연착륙시킬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것은 석탈해 집단을 기존의 정치시스템 안으로 포용하는 한편 기존의 시스템을 그에 맞게 적절히 변형시키는 것이었다(편의상 '포용·변형'으로 간칭).
남해왕의 포용·변형은 그의 치세 기간에 크게 3단계로 나타났다. 그가 처음부터 3단계 전체를 구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그때의 상황변화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3단계의 포용·변형이 나왔을 것이다.
제1단계는 석탈해를 맏사위로 삼은 것이다. 남해왕 재위 5년의 일이었다. 제2단계는 석탈해에게 국정의 전권을 맡긴 것이다. 이 일은 남해왕 재위 7년에 있었다. 이때까지 남해왕이 취한 대응방식은 '포용'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정치시스템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방인 집단을 포용한 것이다.
제3단계는 석탈해에게 왕위 계승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남해왕이 사망한 남해왕 재위 21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되, 아들과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에게 우선권을 인정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왕조 국가에서는 왕의 한마디가 곧 법률이었으므로, 이 유언은 시스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석탈해의 도발을 막기 위해 사위에게도 왕위계승을 인정했으니, 이때 남해왕이 취한 대응방식은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유언에 따라, 아들 유리왕(고구려 유리왕과 다름)과 사위 석탈해 중에서 '나이가 많고 어진' 유리왕이 남해왕의 뒤를 이어 제3대 임금이 되고 유리왕이 죽은 뒤에는 석탈해가 제4대 임금이 되었다. 남해왕은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年長且賢者)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어진 사람'이란 것은 객관적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 유언은 실제로는 '나이가 많은' 유리왕에게 우선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석·김의 평화적 정권교체, 역성혁명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