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명(1896-1950)
독립기념관
그러나 박용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독립단이니 혁명단이니 사칭하는 나부랭이들을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자들과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박용만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이해명이 소리쳤다.
"당신은 왜 당을 배반하였소? 당의 명령을 받들어 당신을 죽이려 하오."
그 소리에 박용만은 멈칫 돌아섰다. 그리고 노기 띤 눈으로 이해명을 쏘아봤다.
"당을 배반했다고? 무슨 당을 말하는 거야? 무슨 당의 명령을 받았다는 거야?"
박용만이 소리를 높이자 이해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무슨 당에 속하는지도 모르는 자였다. 아니면 어떤 당에도 소속하지 않은 자였다.
"당신이 군자금을 내고 우리와 같이 혁명공작을 하겠다면 나는 용서하겠소."
이해명은 가슴 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박용만은 일각의 지체도 없이 이해명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으로는 권총을 든 이해명의 팔목을 붙잡았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머리털을 잡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테러를 직접 몸으로 당한 경험이 있는 그였는지라 겁없이 행동에 나선 거였다. 백가도 가만 있지 않았다. 자리에 벌떡 일어선 그는 박용만의 왼손 팔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놀란 사람은 이해명이었다.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불시의 반격을 받자 순식간에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 총알은 박용만의 왼쪽 어깨 밑을 뚫었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데도 박용만은 이해명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박용만의 왼쪽 팔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때 그의 팔목에 찼던 금시계도 바닥에 떨어졌다. 백가는 얼른 그걸 집어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해명은 총구를 돌려 박용만의 가슴에 대고 두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김문팔이 이해명에게 달려들었다. 권총을 빼앗으려 하자 이해명은 그의 손목에 대고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총소리를 듣고 내실에서 두 사람이 뛰쳐 나왔다. 박용만의 처 웅소청과 이만수였다. 그와 동시에 백가는 응접실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저 놈 잡아라." 박용만이 소리쳤다. "저 놈이 내 시계를 훔쳐간다." 이 소리를 들은 웅소청은 백가를 잡겠다고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응접실에 뛰어든 이만수는 두 팔로 이해명의 두 발을 틀어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용만은 이해명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이만수도 김문팔처럼 조선독립단 단원이었다. 대륙농간공사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두 달 전에 하와이에서 북경으로 와 박용만의 집에서 같이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백가를 놓친 웅소청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박용만은 아직도 이해명의 머리털을 붙들고 있었다.
"이 놈이 나를 죽이겠다고 권총을 쐈소. 경찰을 불러요. 어서."
박용만이 소리치자 웅소청은 다시 집을 뛰쳐나갔다. 그녀가 두 사람의 경찰관을 데리고 왔을 때 이해명은 이미 요리사 조영왕에 의해 결박돼 있었다.
그 곁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박용만과 김문팔이었다. 박용만의 가슴 양쪽의 총알구멍에서는 피가 계속 솟고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베개 삼아 베고 총알 맞은 왼손으로 가슴의 총알 구멍을 막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넘쳐 흐른 피가 흥건히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