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방자전>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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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연출부 스태프로 현장에서 '구르기' 시작한 지 4년. 정민철(가명)씨는 가슴 속에 쌓아둔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지난 15일 서울 홍대 앞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정씨는 "최고은씨의 죽음을 듣고 말 그대로 '계약서를 쓸 때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심정적인 큰 동요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들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이미 작년에 굉장히 유명한 장편영화 조감독이 자살을 했다. 그 조감독의 죽음도, 최고은씨의 죽음도 개별 사건을 놓고 보면 특별한 사건일지 몰라도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왜 그랬을까'가 이해가 가는 사건이었다." 정씨는 "(최고은씨에 대해)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보자마자 이야기하고, 전화해서 이야기하고, 당연히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그런데 이야기만 하는 거다"라며 씁쓸해했다.
"영화라는 게 혼자서 할 수 없는 예술이다. 뛰어난, 경력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서 일 하는 건데, 낮은 데 있는 사람으로서는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너 배우려면 돈 좀 적게 줄 테니까 다음 작품도 같이 하자', '너 배우려면 나 따라다녀야 해'. 한 마디로 '귀속'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을'의 처지에서는 뭐라고 할 수가 없다."많이 달라는 거 아냐. 50만원 주기로 했으면 그거라도 제때 달라" 지난 4년 간 '을'의 입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정씨는 "영화 기획단계에서부터 영화가 극장에 걸려서 모든 상영기회가 끝나고 돈이 제작사나 투자사로 들어와서 잔금정산이 다 될 때까지, A부터 Z까지 모든 제도적인 기준이 법적으로 마련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계약서는 구두계약과 다름이 없다. 예를 들면 후반 작업 같은 경우, 사운드 작업을 한다. 작업이라는 게 원래는 두 달이면 될 일인데 일이 미뤄질 수도 있고 세달 네 달 미뤄질 수도 있다. 그런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잔금이 안 들어온다. '미안해 개봉하고 수익금 좀 들어오면 그때 줄게'. 이런 게 관행이고 관례다. 이유가 납득이 안 간다.돈 안 주면서 '다음에도 우리랑 같이 해야 하잖아'? 이건 협박 아닌가. 이거는 전태일 이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꼼꼼하게 하나하나 제도적인 기준이 마련이 되어야 하고, 그 기준을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을 때 확실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게 법적으로 필요하다."정씨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결국에는 영화의 구조적인 문제인데, 물론 이걸 다 지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적은 돈으로 큰 돈 벌겠다는 거야 장사하는 사람들 입장인 거,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부당대우'를 받고 있다는 게, 대접을 잘 받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저임금?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50만원을 주기로 했으면 주기로 한 돈이라도 제 때 달라는 거다. 어차피 50만원인 줄 알고 일을 한 거니까. 계약서만이라도 지켜달라는 거다. '돈을 벌어야 너네한테 돈을 주지', '흥행을 해야 너네한테 돈을 주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현재는 좀 숨죽이고 있으라는 것. 말이 안 된다.""영화계에서는 왜 아무런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나" 정씨는 최고은씨의 죽음을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에도 답답함을 나타냈다.
"최고은씨가 죽은 것과 관련해서 논의되는 이야기들이 최고은씨의 죽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가 많아서 화가 나더라. 김영하 작가와 조영일 평론가가 싸우는 것도 그 전에 두 분이 '작가론' 논쟁을 하다가 최고은씨가 죽었고, 최고은씨의 죽음이 하나의 소재가 됐다. 메이저 문학계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김영하씨와 언더그라운드 평론가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조영일씨가 최고은씨의 죽음을 당사자처럼 놓고 생각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지 않나.더 웃긴 건, 최고은씨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영화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공감한다. 그런데 정작 영화계에서는 아무런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는다. 김영하-조영일 논쟁만 해도 그렇다. 최고은씨가 문학인인가? 영화 일을 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영화계 내부의 문제를 영화인들이 허심탄회하게 들춰내고 후벼 파는 '대토론회' 같은 게 필요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영화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정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밤을 새도 좋으니까, 힘들어도 좋으니까 합리적인 대가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또 하나. 정씨는 언젠가 자신이 '갑'의 위치에 있는 감독이 됐을 때는 '공정한 절차'를 거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자신이 지난해 만든 단편영화 후반작업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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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죽음, 전혀 충격적이지 않았다 월 50만원 계약서라도 제발 지켜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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