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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전국 확산 우려가 점점 현실로 나타나던 1월 4일, 늦은 시간인데 면사무소 총무담당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큰일 났습니다. 결국 터졌네요. 잠시 후 7시부터 긴급 기관단체장회의를 열기로 했으니 꼭 참석해 주세요."
안흥면(강원도 횡성군) 소재지로부터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내 최대 규모 양돈단지인 S축산에서 결국 구제역 의심신고가 들어왔다는 것. 검사결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증상으로 보아 구제역이 확실하다는 게 군 방역상황실의 판단이라고 한다.
강원도 최대 양돈단지 구제역 발생
안상훈 횡성 부군수 주재하에 대책회의가 진행됐다. 주요 논제는 침출수 피해 방지를 위해 어떤 공법으로 매몰작업을 진행하느냐는 것. S축산이 사육 중인 돼지가 무려 3만7천 두로 단위 살처분 규모로는 유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농장 위치가 안흥면민의 상수도 취수지 상류에 자리 잡고 있어 침출수가 하천에 유입될 경우 대재앙이 닥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밤이 깊어갔지만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결국 다음날 다시 한 번 대책회의를 열기로 하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이미 다른 지역 매몰지에서 침출수가 흘러나오는 등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만큼, 군 방역당국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 주민들에게 제시토록 한다는 원칙만을 합의했을 뿐이다.
이 자리에는 S농장주 김아무개씨가 참석했다. 착잡한 표정이었으나 비교적 담담하게 회의에 임했다. 오히려 상황에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듯, 살처분 작업에 있어서 방역당국과 농장의 역할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주장을 차분히 전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날 열린 긴급 대책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도내 최대 규모 양돈단지를 보유한 군과 면 당국이 사전에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성토로부터 시작, 면민의 상수도 안전과 지하수 및 하천오염, 청정 지역이미지 훼손에 따른 피해 등 우려와 함께 확실한 안전대책이 강구된 후 매몰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면 전날 대책회의에서 거론된 살처분 대책에 대한 횡성군의 설명은 없었다. 단지 '자리를 걸고 완벽한 살처분 대책을 세워 시행하겠다'는 고석용 군수의 의지만이 면장을 통해 되풀이됐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없이 대책회의는 산회됐다.
주민 불안 확산, 비상대책위 구성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각 마을 이장과 사회단체장들이 술렁였다. 방역당국만 믿다가는 면 전체가 최악의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확산됐다. 번영회를 중심으로 별도의 대책회의가 열렸고 결국 7일, 주민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비대위 구성 당일 군수면담이 추진됐다. 고맙게도 고석용 군수가 바쁜 일정을 뒤로 미루고 급거 비대위 회의장을 찾았다. 군 건설방재과장을 대동했다. 군도 사상 최대 살처분 사태를 맞아 나름대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려 애쓴 흔적이 건설방재과장의 설명에서 나타났다. 매몰지 내부에 통상 사용되는 비닐 두 겹 외에 방수천막을 추가하고, 유공관을 통해 침출수를 뽑아내 폐수처리 후 폐기하는 등 차별화된 공법들이 동원된다는 것. 비대위원들의 얼굴에 그제서야 조금씩 안도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대위는 이 자리에서 살처분 현장에 주민대표를 투입, 함께 상황을 점검하고 협력하겠다는 계획을 고석용 군수에게 밝히고 제한 없는 참관활동 보장을 요청했다. 군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침출수 분출 방지용 시설성락
▲ 침출수 분출 방지용 시설
ⓒ 성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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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출수 배출용 유공관 설치성락
▲ 침출수 배출용 유공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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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작업이 끝난 현장. 가스 및 침출수 배출관이 설치됐다.성락
▲ 매몰작업이 끝난 현장. 가스 및 침출수 배출관이 설치됐다.
ⓒ 성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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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부터 시작된 살처분 현장에 주민 참관인 4명이 투입돼 관계공무원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들로부터 작업 상황에 대한 실시간 보고가 비대위로 접수됐고, 비대위는 각 마을 이장을 비롯한 비대위원 전원에게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상황을 알려줌으로써 불필요한 불안감 확산을 차단했다.
현장에 투입된 참관인들로부터 전해 오는 살처분 매몰 과정은 매우 참혹했다. 전기충격에 의한 살처분 방식은 현장에선 이미 무용지물. 잠시 실신했다가 깨어나 구덩이를 휘젓는 통에 침출수 흡수 방지용 비닐이 훼손되고, 작업자들에게 감전 위험이 있어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돼지를 서너 마리씩 한곳에 모아 굴착기 장비로 압사시켜 구덩이에 차곡차곡 쌓는 방식을 활용하는데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것. 참관인은 물론 작업인부와 공무원들은 매서운 한파에 맞서야 함은 물론, 악취와 비명소리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술로 잠을 청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계획대로 1, 2, 3공구 매몰 작업이 순조롭게 끝나갈 무렵 비상이 걸렸다. 예정됐던 매몰지에서 작업 중 물이 나오거나 암반층이 발견돼 더 이상 매몰지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살처분 매몰은 발생지 반경 500m를 벗어날 수 없어 작업이 중단될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 이제 겨우 전 두수의 3분의 1 정도 살처분이 진행된 터라 군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굴착작업중 암반이 나와 중단된 매몰지성락
▲ 굴착작업중 암반이 나와 중단된 매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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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민 참관인으로터 긴급한 의견이 접수됐다. 농장 내 폐수처리 시설로 활용하려 건설해 놓은 대형 저류조가 8개나 있는데,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방수처리까지 된 시설물이므로 이곳을 활용하면 나머지 전 두수를 안전하게 매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시설물을 활용하는 안은 이미 첫 대책회의 때도 거론 됐었으나, 농장주는 처리 가능 용량이 극히 미미하고 고가의 비용이 투입된 시설물이라는 이유로 사용불가 입장을 보였었다. 또한 비대위에서도 한 차례 면장을 통해 건의한 바 있으나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묵살된 바 있는 터였다.
폐수처리용 저류조 매몰지 사용 건의
그런데 농장주의 입장에 약간의 변화가 발견됐다는 것. 건설비용을 보상해 주면 저류조 사용을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는 것이다. 처리 가능 용량도 당초 예상보다 훨씬 커 남아있는 돼지를 모두 매몰하고도 남는다는 의견이었다.
비대위는 고석용 횡성군수에 긴급 면담을 요청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미 법정 살처분 기일이 경과한데다 더 이상 매몰지를 찾을 수 없는 상황, 더욱이 방수 처리된 튼튼한 구조물에 매몰한다면 침출수로 인한 지하수 오염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고 사후관리 측면에서도 폭우로 인한 매몰지 유실 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획기적인 방안이기 때문이다.
▲방수 콘크리트 저류조 매몰현장성락
▲ 방수 콘크리트 저류조 매몰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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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의를 접한 고석용 군수는 담당 공무원을 불러 타당성 여부를 확인한 후 즉석에서 지시를 내렸다. 저류조 사용 문제를 농장주와 협의하되, 선집행하라는 것. 추후 있을 수 있는 분쟁도 감수하라는 것이다. 신속한 매몰작업 진행, 침출수에 의한 지하수 오염 예방, 매몰지 사후관리 등 측면에서 이보다 좋은 대안은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때문이다.
다음날, 고석용 군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농장주와 협의가 진전되지 않아 부득이 공권력을 투입해 매몰작업을 강행키로 했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현장 참관인들로부터도 작업개시 보고가 접수됐다.
S축산의 대규모 살처분 작업은 이후 3일 만인 1월 16일 종료됐다. 농장주도 결국 사후 합의에 응했다고 한다. 마침 이날 횡성 지역 구제역 현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과 주민 대표로서 오찬을 함께할 기회를 얻게 됐다. 그 자리에서 건의했다.
"S축산은 대규모 축산기업으로서 그간 수차례 축산폐수 무단방류 등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왔고, 이번 구제역 사태 시에도 매몰지 선정 비협조 등 사회적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소규모 축산농가에 대해서는 재기를 위한 용기와 지원을, 기업형 축산업에 대해서는 방역시스템 등 엄격한 요건을 갖추어 스스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앙 위기에서 민, 관 협력 극복 사례
안흥면 구제역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2월 18일 해체됐다. 비대위 36일간의 활동을 종료함에 앞서 고석용 횡성군수를 면담한 자리에서, 지역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 민과 관이 협력함으로써 주민의 안전을 지켜내고 불필요한 갈등과 불안을 차단한 드문 선례를 이루어 냈음을 함께 축하했다.
최근 해빙기를 앞두고 살처분 매몰지의 침출수 유출 및 지하수 오염, 상수도 오염 우려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3백만 마리가 넘는 대규모 살처분 작업이 단기간에 집중되면서 예상됐던 현상들이다. 지금, 안이했던 방역당국에 대한 원망과 허술한 매몰 작업에 대한 비판보다, 참여와 협력으로 국가적 대 재앙에 맞서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2011.03.04 20:24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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