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들의 배부른 고민, 88만원 세대 열받겠다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74] 꿈은 명품관, 현실은 아울렛?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등록 2011.03.31 12:44수정 2011.05.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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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 브리짓 존스의 사랑 찾기로 대박을 터트린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원작 소설을 흔히 칙릿소설의 원조로 봅니다. 이후 신문연재 칼럼을 원작으로 한 <섹스 앤 더 시티>나 로렌 와이스버거 원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영화들이 흥행 붐을 일으키면서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속어 칙(Chick)과 문학(Literature)의 합성어인 '칙릿'(Chick-lit)이 문학과 영화에서 한 흐름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최근의 칙릿소설이나 영화는 대개 대도시 20~30대 미혼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패션이나 출판, 광고, 방송 등과 같이 트렌드에 민감한 직장에서 일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그리는 것도 닮은꼴입니다. 마치 입안에서 톡, 톡 터지는 날치알마냥 젊은 날의 낭만과 사랑, 고뇌와 방황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청춘백서라 할 만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여고졸업생의 일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현실과 남루한 성장을 담아낸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년작)는 한국식 칙릿영화의 독보적인 작품으로 꼽을 만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이번에는 명문여대 연영과를 졸업하고 누구보다 눈부시게 살고 싶어하는 24살의 '그녀들'이 등장했습니다. 10년의 세월만큼 한국사회의 20대 여성들의 꿈과 희망의 색깔과 농도는 얼마나 짙어졌을까요? 아울러 칙릿영화는 얼마나 진화했을까요?

된장녀들의 사치와 자기애만 클로즈업되다

영화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는 졸업식장에 선 세 명의 친구 유민(윤은혜), 수진(차예련), 민희(유인나)와 그 시간에 마사지를 받는 혜지(박한별)와 함께 명품구두를 비롯해 옷, 보석, 가방 등을 클로즈업하며 오프닝을 엽니다. 그리고 10달 뒤인 11월 11일 빼빼로데이. 훤한 대낮에 술에서 깨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변기에 대고 웩, 웩 토하는 모습에서 그녀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a  백수로 지내면서도 강남의 마사지 숍에서 전신미용을 받으며 한담을 나누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88만원 세대의 비애와 절망은 설 자리가 없다.

백수로 지내면서도 강남의 마사지 숍에서 전신미용을 받으며 한담을 나누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88만원 세대의 비애와 절망은 설 자리가 없다. ⓒ (주)토리픽쳐스


개중에 유민이 방송국의 괴팍스러운 메인작가의 보조 작가로 취업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배우지망생인 수진은 서울대 대학원생을 사칭해 삼수생 과외를 하면서도 친구들에겐 정규직 신입사원인 척하고, 돈이라면 부족한 게 없는 민희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유학을 가겠다며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혜지는 클럽과 마사지 숍을 들락거리며 연예인이 되는 날만 학수고대합니다.

그런 어느 날, 혜지가 유명 청바지의 모델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CF계의 신데렐라가 됩니다. 반면 유민은 메인작가의 쌍둥이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없고, 수진은 오디션에 응시하지만 연거푸 낙방하고, 텅 빈 민희의 머리에 알파벳은 주입되지 않습니다. 서로 함께할 때면 부러울 게 없었는데, 어느덧 균열이 가고 상대적 박탈감에 짓눌리던 수지는 혜지를 향해 차곡차곡 담아 두었던 분노를 터트리며 충돌하기에 이릅니다.


영화 <마블미>는 '꿈은 명품관 현실은 아울렛'이라는 헤드카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대학만 졸업하면 영화 속 주인공마냥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던 그녀들이 까나리액젓보다 더 쓰디쓴 현실과 부딪치며 겪는 좌충우돌식 성장을 스케치합니다. 하지만 그 뿐입니다. 영화는 된장녀들의 배부른 고민으로 치부될 만큼 정체성이 모호합니다. 오프닝에서 교차 편집하며 클로즈업한 명품전시장처럼 된장녀들의 사치와 자기애가 클로즈업되는 반면 일과 고뇌와 사랑은 이물질처럼 겉돌기만 하니까요.

꿈을 이루기 위해선 빈곤과 생존 중 하나를 택일하라


영화는 수진을 통해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묘사하려고 애씁니다. 누구 못지않게 스펙을 챙겼으면서도 수진은 연기자의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영화는 수진이 번번이 탈락의 쓴잔을 마시는 이유를 분명하게 적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넷 중에 가장 똑똑하고 당찼던 수진은 아빠의 사업부도로 집안이 몰락하고, 알바를 전전하는 자신의 치부(?)를 까발린 혜지와 맥주병을 날리며 싸우는 장면으로 비유적으로 드러낼 뿐입니다.

a  수진이 학력을 속이고 삼수생 과외교사로 알바를 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있다. 하지만 수진의 알바는 뭉개진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버팀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수진이 학력을 속이고 삼수생 과외교사로 알바를 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있다. 하지만 수진의 알바는 뭉개진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버팀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주)토리픽쳐스


상황극 치료센터에서 여자환자로부터 따귀를 맞으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수진이 두 탕 세 탕 알바를 하는 장면은 그나마 88만원 세대의 현실에 근접합니다. 하지만 명품을 대여해 입고, "알바와 정규직이 뭐가 다른 거냐"는 민희의 질문에 "알바가 동거라면 정규직은 결혼"이라는 수진의 생뚱맞은 대답에서 영화는 살 떨리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느 88만원 세대와 공감대를 형성해 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88만원 세대의 상징은 유민의 고등학교 동창 영미(최윤영)입니다. 여고시절부터 글 솜씨가 있었던 유민 주위를 맴돌며 작가의 꿈을 키웠던 영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공무원이 됩니다. 하지만 꿈을 접기에 청춘의 빛은 너무 푸르고 밝기만 한 법. 외주제작사의 보조 작가로 취업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아이디어는 퇴짜 맞기 일쑤고 결국 후임 보조 작가가 서브작가로 승진하면서 영미의 꿈은 비애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맙니다.

생리가 끊겨 고심하던 유민이 변기에 앉아 전전긍긍하며 임신 테스트기로 임신 여부를 확인하던 순간, 영미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던 유민에게 영미는 "너에게 소포를 보냈다"는 알 수 없는 말만 남깁니다. 유민은 임신이 아닌 것에 안도하고 같은 시간에 영미는 자살을 합니다. 우편물에는 유민이 여고 때 영미에게 건네준 글쓰기작법만 오도카니 들어 있습니다.

영미가 같은 보조 작가인 유민에게 띄운 연대의 손길은 얼마 전 요절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를 떠올리게 합니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대목은 영화의 유일한 미덕으로 꼽힙니다.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 빈곤과 생존 중 양자택일 할 것을 요구하며 영화의 안과 밖에서 그녀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랙 미니드레스의 신화에 갇힌 영화

"25살은 꿈꾸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내 삶의 중심에 있다"는 유민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5년 전 입학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우연히 블랙 미니드레스를 입고 나란히 앉은 인연으로 절친이 된 그녀들의 꿈과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마블미' 신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a  명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들의 모습에서 한국식 칙릿영화의 현 주소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명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들의 모습에서 한국식 칙릿영화의 현 주소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 (주)토리픽쳐스


이렇게 영화는 하이패션 '블랙 미니드레스'를 통해 20대 여성들의 성장과 욕망을 절절하게 조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위 5%에 들 정도로 가진 게 너무 많은 그녀들의 자기연민에서 출발한 영화의 캐릭터는, 가진 게 너무 없는 대다수 88만원 세대의 빈곤과 내밀하게 소통하는 데서 줄곧 엇박자를 놓습니다. 그러다 보니 치열한 생존의 터전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상처투성이 성장은 보이지 않고 압구정동의 화려한 네오사인과 클럽과 마사지 숍으로 대변되는 얄팍한 욕망만 분출됩니다.

그녀들이 부딪친 현실의 벽이 강조될수록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담아내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빗나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20대 여성들의 속물적 욕망과 섹스를 알맹이 없이 적나라하게 그려낸 <섹스 앤 더 시티>의 한국판을 자임하거나 감각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여성들의 판타지를 솔직하게 드러냈다면 한편의 트렌디한 CF물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여자는 된장녀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된장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좋아한다"는 유미의 대사처럼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영화 속 그녀들 간의 이해의 폭은 물론 '된장녀에게도 고민은 있다'는 메시지로 관객들과도 공감의 폭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마블미>가 이 영화 저 영화를 패러디하면서 20대 여성들의 현실과 이상을 짜깁기하다 기우뚱거리는 절름발이 신세를 면피 못한 이유입니다.

한국의 칙릿영화는 <로제타>를 만들 수 없을까

칙릿영화도 88만원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충분히 녹여낼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땀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나오는 일상의 단면을 촘촘하게 짜들어 간 스토리라인에 발랄한 유머와 위트로 담금질해 삶의 무게를 절감하며 성장해 가는 대표적인 리얼리티 영화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과장없이 사실감 있게 그려낸 <고양이>를 잇는 영화가 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비록 <고양이> 속 다섯 명의 그녀들이 <마블미>의 그녀들처럼 멋지게 빼입지도 못하고, 강남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지 못해도 상처투성이가 된 마음을 함께 어루만지며 서로를 보듬는 과정을 보며 관객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감과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의 한 여상을 나온 10년 전의 그녀들이나 대학을 졸업한 지금의 그녀들이나 한국사회의 88만원 시대의 좌절과 절망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마블미>는 멀게는 <고양이>와 가깝게는 <내 깡패 같은 애인>처럼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에 무릎 꿇기엔 '나는 아직 젊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합니다. 한 톨의 씨앗이 동토의 대지를 뚫고 새싹이 되고 마침내 제 땅에 탄탄히 발을 딛고 선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자신만의 나이테를 가슴에 품으라고. 그리고 힘찬 심장의 박동을 벗 삼아 끊임없이 현실의 벽에 도전하라고.

이제 남는 몫은 20대 그녀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시난고난한 선택과 도전과 성장에 격려를 아끼지 않을 칙릿영화입니다. 마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로제타>가 벨기에에 청년실업 해법인 '로제타 계획'(Rossetta Plan)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듯이, 그녀들과 칙릿영화의 건투와 연대가 한국사회에서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한국판 <로제타>를 직조해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욕심이 과한 것일까요?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88만원 세대 #고양이를 부탁해 #내 깡패 같은 애인 #로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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