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대구사태의 진원지였던 대구의전(현 경북대의대)허술한 방역 행정을 비판한 이상요 교수를 경찰이 구금한 것은 대구사태를 악화시킨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정만진
해방 당시 대구의 인구는 10만 정도였다. 그런데 <대구시사>는 1만여 노동자와 학생들이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고 폭도화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했다. 전체 인구의 1/10이 폭도화되었다는 것이니, 아이들을 제외하면 폭동에 참가한 이들의 비율은 더욱 높을 것이다. 그렇게 기득권층에 저항했던 대구가 어느덧 보수정당의 텃밭 노릇을 하고 있는 현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신복룡은 말한다.
'대구사태는 당시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노동해방의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그것이 공산혁명은 아니었다. (중략) 그것은 단지 굶주림과 압제에 대한 민중적 항쟁이었고, 남로당의 전술이 종속변수로 개입되었을 뿐이다. 대구사태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민중적 소망에 대한 잔혹사였을 뿐이다.' 당연히 대구에는 1946년의 10월을 말해주는 역사유적이 전혀 없다. 아니, 이곳이 사건의 현장이라는 표식도 전혀 없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군가는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 알고 있겠지만, <10월 인민 항쟁 연구>의 정해구, <한국분단사연구>의 신복룡 등 전공 학자들은 지금도 그 진상과 성격을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반면, 정작 대구사람들은 그 누구도 기록을 남기는 일에 뛰어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대구, 4·19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의거를 일으켰던 대구, 1960년대 교원노조의 발상지이자 최고 조직률을 과시했던, 대구, 이승만 정권 때만 해도 '야도'임을 당당히 자랑했던 대구, 그러나 1946년의 10월에 대해서만은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구, 과연 무엇 때문일까.
대구사람들은 1946년 10월을 잊고 싶다대구 사람들은 10월을 잊고 싶다. 해마다 10월이 되어도 1946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1946년 당시 '폭도'였던 본인 또는 그 아들딸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내심으로는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상당수 학자들이 공산혁명은 아니었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1946년의 10월 사건에 참여하였다는 이력이 드러나면 그 즉시 '빨갱이'로 몰릴까 봐 대구사람들은 끝없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시사>가 그처럼 10월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자세하게 적다가는 필연적으로 사람 이름이 등장할 터인데 그렇게 하고도 과연 책이 발행될 수 있을까. <대구시사> 제1권 통사 1204쪽은 '10·1사건에 관하여서는 뒤에 별도의 항목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상술할 필요가 없'다면서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짧은 소개문만 기록하고 있지만, 1228쪽이나 되는 방대한 책을 '쥐 잡듯' 뒤져보아도 상술은 커녕 단 한 줄도 10월에 대해 언급이 없다. <대구시사>를 집필한 학자들은 상술할 계획을 세웠던 모양이나, 누군가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강제한 듯하다. 그는 (또는 그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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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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