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양 가는 길싱이 외곽, 노점상. 간단한 튀김거리를 파는 가족들.
최성수
익숙함과 낯설음에 대하여타의에 의해 묵게 된 호텔이지만, 새로 옮긴 하이위 빈관은 고급답게 깨끗하고 호화로웠다. 그래서일까? 싱이에서의 둘째 날 밤은 꿈도 없이 잠이 들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호텔 뷔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미적거리며 여행지의 아침을 즐긴다.
"역시 여행에서 아침은 현지식이어야 해."아침 식사였던 호텔 뷔페가 영 성에 차지 않아 한 마디 하자 아내도 동감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서양식에 중국식이 뒤섞인 퓨전의 호텔 뷔페보다는 길거리에 나가 사먹는 쌀국수가 더 좋은 걸 보니 아내도 이제 배낭 여행자가 다 된 것 같다. 호텔비에 포함되어 있는 아침식사라 먹긴 먹었지만, 뭔가 부족한 듯하다.
"안순 가는 길이 9시에 막혔다는데요."후배가 걱정어린 투로 나를 찾아와 말한다. 어제 싱이에는 비가 내렸는데, 안순 넘어가는 길에는 눈이 와 아침 아홉시에 차랑 통행이 차단되었다는 것이다. 첫차도 겨우겨우 갔다며, 일정 조정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할 수 없지, 뭐. 여행이라는 게 계획한 대로 다 되면 재미없잖아. 그냥 싱이에서 하루 더 묵을까?" 안순(安順)은 황과수폭포(黃果樹瀑布)를 보기 위해 계획했던 여행지다. 그런데 길이 끊겨 갈 수 없다니 포기해야 하나? 아쉽다는 생각을 하는데, 후배가 곰곰 생각하더니 입을 연다.
"그냥 구이양으로 해서 카이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순에 들르지요."
그렇게 해서 다음 목적지는 구이양으로 자연스레 결정된다. 안순을 거쳐 들르기로 한 곳이었는데, 먼저 가는 셈이다.
짐을 챙겨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프런트에서 구이양 가는 버스편을 알아보던 후배가 빙그레 웃는다.
"여기서 기다리래요. 버스를 잡아온다는데요."버스를 잡아온다고? 아니 구이양 가는 버스면 시외버스인데, 그걸 호텔로 잡아올 수가 있다고? 내가 황당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후배가 다시 웃으며 말한다.
"여긴 중국이잖아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어요."정말 그 말대로 얼마 후에 제복을 입은 호텔 직원이 출입구에서 우리를 부른다. 나가보니, 짙은 초록색 버스 한 대가 호텔 정문을 들어서고 있다. 일행 모두들 황당하지만 즐거운 표정이다. 차에 오르니 승객이 몇 되지 않는다.
호텔을 나선 버스는 한 십 여 분 달리더니 갑자기 멈춰 선다. 차에서 기름이 샌다는 것이다. 이런, 차를 고쳐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하고 걱정을 하는데, 세운 우리 차 앞에 다른 버스가 와 선다.
"모두들 앞 차를 타라. 이 차는 기름이 새서 못 간다."차장이 우리에게 소리친다. 구이양 행 다른 버스로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옮겨 탄 버스는 아까 버스보다 더 새 차다. 새 차라고 해도 꽤 낡아 의자가 흔들거리기도 하고, 뒤로 젖혀진 상태로 고정돼 버린 것도 한 둘이 아니다. 그래도 갈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괜히 잘못됐으면 차 수리하느라 한정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싱이 시내를 벗어나던 버스가 이번에는 외곽 버스 터미널에 서더니 한 시간 남짓 움직이지 않는다. 그동안 사람들이 하나 둘 차에 올라 좌석이 꽉 찬다. 갓 결혼한 신부인 듯, 짙은 화장을 하고 부케를 든 신부가 노인네들을 모시고 차에 오르더니, 자리를 잡아주고 내려간다. 차창으로 바라보니, 신부는 차 안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차 안에 탄 노인데들도 눈물을 찍어낸다. 아마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친정 부모인가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이별의 슬픔이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나는 국외자처럼 바라본다.
기다리기 지루해 차에서 내려 길가로 가 본다. 튀긴 음식을 파는 곳에 가 군것질 거리를 좀 산다. 식구들인지, 여럿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신기한 동물이라도 본 것처럼 나를 쳐다본다. 외국인이 길거리 음식을 사 먹으니 이상한가보다. 그 시선을 두로 하고 다시 차에 오른다.
드디어 오전 10시 30분, 버스가 터미널을 벗어난다.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을 모두 채우고 출발하는 것이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얼었대요. 원래 5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늘은 12시간 쯤 걸릴 것 같다네요."후배가 운전기사의 말을 전한다. 12시간이라니, 이 좁은 버스 안에서, 게다가 내 의자는 뒤로 젖혀져 허리 지지조차 힘든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 내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고속도로로 진입을 하면서 보니, 구이양까지 거리가 317㎞다. 12시간 걸리면 한 시간에 약 24㎞ 정도 간다는 것인데, 거의 달리지 않고 기어가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버스는 시속 60㎞는 넘는 속도로 달린다. 워낙 변수가 많은 중국의 도로 교통 사정을 알기에, 중간에 무슨 일이 생겨 한없이 멈춰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정말 얼마 달리지 않아 고속도로 차선 하나가 막혀있고, 무슨 이유에선지 막힌 차선에는 흙무더기를 군데군데 쌓아놓았다. 정말 열두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간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는지, 안개 가득한 산기슭으로 눈이 제법 쌓여 있다.
도로에도 군데군데 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은지, 눈은 녹는 중이다.
산비탈에 일구어놓은 작은 밭에는 푸른 보리가 싱그럽다. 그 보리 위에 살짝 눈이 놓여 있다. 배추도 머리에 눈을 인 채로 안개를 견뎌내고 있다. 상고대가 눈부신 고개를 넘기도 한다. 터널을 하나 지나고 나자, 그쪽은 다른 세상이다. 눈은 눈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차는 씽씽 달린다. 이렇게 달리면 다섯 시간도 안 걸려 구이양에 도착할 것 같다.
눈이 조금 온 것을 가지고 그리 호들갑이었나 보다. 하긴 워낙 눈이 오지 않는 구이저우이고 보면, 이 정도 눈에도 길이 끊길 만하다. 더구나 몇 년 만에 내린 눈이라니, 아무런 대비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그저 조심운전을 홍보할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도로까지 차단해야 하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우리는 늘 익숙한 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익숙함이란 실은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익숙하다고 남도 익숙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익숙함이 남에게는 낯설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나의 익숙함으로 '겨우 요정도 눈 가지고'라고 판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구이저우 사람들에게는 이런 눈이야말로 폭설일 수도 있고, 일상적이지 않은 낯설음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 사람은 얼마나 자기 안에 갇혀 살아가는 존재인가!
구이양(貴陽) 가는 길열두 시 반, 버스 안 룸미러를 보니, 기사가 꾸벅꾸벅 존다. 길은 구불구불하게 산을 휘감아 도는데, 기사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앞을 주시하다가 깜빡 졸곤 한다. 그걸 바라보는 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괜히 기사 옆에 앉아있는 차장에게 말을 붙인다.
"화장실 가고 싶다.""조금 더 가면 휴게소 있어.""얼마나 가야 되는데?""한 삼십 분 쯤.""이거 먹어봐. 한국 껌이다."내가 가져간 껌을 꺼내 차장에게 내밀자, 차장이 받아 기사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도 씹는다.
"고마워."기사가 껌을 입에 넣고 씹으며 말한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나도 안심이 되어 내 자리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