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을이 돼지무덤... 구제역 또 오면 어디 묻을 거여?"

강원도 횡성군 소사리 돼지농장 재입식 반대 결의대회 현장

등록 2011.04.16 15:28수정 2011.04.1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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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10시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 S농장 앞, 집회 장소로 지정된 길 옆 공터와 도로 사이에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준수'해야 할 사항이 적힌 입간판이 세워지고 폴리스라인 침범에 대한 경고사항이 따로 게시됐다.

소사리 4개 마을은 물론 인접한 지구리 주민들이 참여하는 '소사리 돼지농장 재입식 반대 결의대회' 장소에 경찰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행사이니만큼, 경찰 입장에서도 불의의 사태를 미연에 막고자 했을 터이다.

 돼지 재입식 반대 결의대회
돼지 재입식 반대 결의대회성락

일손이 바빠지는 시기인지라 이른 아침부터 논밭에 나갔던 주민들이 시간이 되면서 속속 모여들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진 지구리 주민들은 아예 관광버스를 가득 채워 타고 도착했다. 행사장이 이내 150여 주민으로 채워졌다. 어깨띠에 머리띠, 각종 구호가 적힌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펼치니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웃 상안리 풍물패가 먼저 분위기를 띄웠다. 꽹과리의 선창에 맞춰 장구와 북이 소사리 골에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시위 경험이 없는 산골마을 주민들의 상기됐던 얼굴이 풍물패 한마당 놀이에 풀어진다. 들고 있던 피켓을 흔들고 춤을 덩실덩실 추는 주민도 눈에 들어온다.

 풍물패와 어우러진 주민들
풍물패와 어우러진 주민들성락

전염병 또 오면 더 이상 묻을 곳도 없어

주민대책위원장인 박상수 소사리 이장의 대회사로 결의대회가 시작됐다. S농장 가장 가까이에서 한우 20여 마리를 사육하는 박 이장이 결연한 목소리로 준비한 대회사를 읽어 내린다. 모든 주민들의 걱정과 그간의 피해, 재입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조목조목 반영돼 있다.

온 마을이 돼지 똥 냄새로 진동해도 순박한 우리는 참고만 살았습니다. 비만 오면 축산폐수를 몰래 흘려 버렸지만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만 믿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제역으로 3만7천 마리나 되는 돼지를 농장 내에 묻어 마을을 돼지무덤으로 만들고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S농장을 더 이상 우리 이웃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S농장 내에는 더 이상 돼지를 묻을 곳이 없습니다. 이대로 돼지를 재입식했다가 또 전염병이 오면 그때는 마을 뒷산은 물론 앞마당까지 돼지무덤 자리로 내주어야 할 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재입식을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S농장이 우리 마을을 떠나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깨끗한 물 먹고 싶어요" 주민들의 소박한 바램
"깨끗한 물 먹고 싶어요" 주민들의 소박한 바램성락

 구호 외치는 김인덕 횡성군의원
구호 외치는 김인덕 횡성군의원성락

 조남국 안흥면 번영회장
조남국 안흥면 번영회장성락

이어 주민 진원섭씨와 김순태씨가 결의문을 낭독한 뒤, 안흥면 출신 함종국 강원도의원이 연단으로 나섰다. 오래전부터 안흥면 번영회장으로서 S농장의 불법 폐수 방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감시 활동을 주도한 함 의원이 그간의 S농장 행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어 김인덕 횡성군 의원의 연설, 남홍순 안흥농협 조합장의 연설과 구호 제창으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다. 마지막으로 연단에 등장한 조남국 안흥면 번영회장, S농장을 관통하는 마을 안길을 따라 행진하며 돼지 재입식 반대와 농장폐쇄를 원하는 주민의 목소리를 전달하자는 제안에 주민들은 함성으로 호응했다.

현장에 나와 있는 경찰 관계자들과 집회 관계자들이 농장 측과 조율을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로 굳게 차단돼 있는 농장 정문을 열어야 행진이 가능하기 때문. 다시 풍물패의 한마당 놀이가 펼쳐졌다. 영남가락 중 별달거리 장단과 구호가 서로 잘 어우러진다.

 농장내로 진입, 행진하는 주민들
농장내로 진입, 행진하는 주민들성락

굳게 닫힌 바리게이트를 연 노인회장님의 호통

농장 입구에서 결국 실랑이가 벌어졌다. 정문 바리케이드를 열지 않는 농장을 향해 주민들은 분노를 쏟아냈다. "수십 년 전 우리가 삽 들고 닦아놓은 길인데 누구 맘대로 막는 거여. 당장 문 열어라!" 소사리 노인회장님의 노기 어린 호통이 통했는지 정문을 막고 있던 바리게이트가 '덜커덕' 올라갔다.

세 시간여에 걸친 결의대회와 행진은 마을회관 마당에서 한 해단식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주민들은 십수 년간 쌓인 체증을 털어버리기라도 한 듯 속은 시원하다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이다. 부녀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가 팔자에 없는 시위에 지친 주민들에게 위로가 됐다. 긴장됐던 결의대회를 마무리하는 박상수 위원장의 폐회사가 애절하다.

"오늘 행사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주민의 권리를 찾고, 청정 안흥을 지켜나가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영리만을 목표로, 환경 파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웃을 업신여기는 몰지각한 축산 기업을 반드시 몰아내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읍시다."
#구제역 #재입식 반대 #돼지농장 #안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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