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부럽죠? 그럼 나처럼 살아볼래요?"

[30대, 내 멋대로 산다 ④] 연극배우 이성일이 사는 법

등록 2011.05.10 21:03수정 2011.05.1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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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연극배우 이성일

연극배우 이성일 ⓒ 신나리


"무역학과였죠. 후에 취업도 잘 된다 하고 일단 점수에 맞춰 가야 했으니까요."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말했다. 서른여섯의 십 년 차 연극배우 이성일. 지금은 보통의 서른여섯인 친구들과 다른 인생행로를 걷고 있지만 출발은 비슷했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지만, 대충 성적에 맞춰 취업이 잘 된다는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곳은 군대였다고 한다. 고민은 제대 후 실천으로 이어졌다. 상명대 연극학과로 편입해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역영어 책을 덮고 몸을, 움직임을 배웠다. 한국무용을 배웠고 마임을 시작했다. 그 결과, 졸업할 때 그는 주연을 맡았다.

졸업 후 '연출가 데뷔전'(2003)을 비롯 '제1회 젊은연출가오목전'(2005), '제2회 여성연출가전'(2006)부터 4회(2008)까지, 그리고 지난해 6회 <인형의 집>에서 '크로그스타트' 역까지 꾸준히 참여했다. 새롭게 시작하거나 기존 작품을 재해석하는 연출가들과 많은 작업을 해온 그는 현재 '극단 시공' 소속으로 5월 11일부터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새로 시작하는 <why not?>(작가 윤상훈/연출 류근혜)을 준비 중이다. 그렇게 그는 비로소 원하는 일을 하게 된 동시에, 보통의 삶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다.

"왜요, 다들 제가 제일 부럽다 하죠. 그래서 제가 그럼 '너, 나처럼 살래?' 하면 아무 말 안 해요."

삼십대 중반을 넘어선 삶이란 무엇일까. 주위에 물어보니 '타협하는 게 많아지는 삶'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직장이 있고, 지닌 것이 많기에 그만큼 적당히 자신의 기준을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내일의 꿈보다 오늘을 살아내는 게 중요하고, 내가 원하는 삶보다 가족이 원하는 삶을 계획하는. 배우 이성일이 가진 딜레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보시기에 성공한 아들이 되고 싶었죠. 부모님 기준에서는 아마 돈 잘 버는 아들일 텐데 제가 그걸 못하고 있죠.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형님이 계시는데, 부모님을 잘 챙겨주세요. 다행이고 고맙죠. 저는 뭐 그냥… 부모님은 제가 자장면 한 그릇 사드려도 우리 막내아들이 사줬다고 주위에 자랑하세요. 저는 그렇게 사사로운 행복을 담당하죠.(웃음)"


삼십대를 넘어서며 고민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또래들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아볼까 바로 작년까지도 많은 고민을 했단다. 그는 결국 연극을 택했다.

"말하고 표현하는... 연극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


a  연극 속에서 배우 이성일(왼쪽)은 자신을 내려놓고 작품 속 인물의 삶에 푹 젖는다.

연극 속에서 배우 이성일(왼쪽)은 자신을 내려놓고 작품 속 인물의 삶에 푹 젖는다. ⓒ 황규백

"제가 연습실에만 가면 그렇게 먹어요. 평소에는 안 그런데, 이상하게 연습실에서는 계속 배가 고파요."

아무래도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지 않겠느냐고 그가 덧붙였다. 고민 결과 연극을 선택한 이유다. 연습실에서 그는 자신을 내려놓고 작품 속 인물의 삶에 푹 젖는다. 그 인물 자체가 되어 또 하나의 삶을 살아낸다.

백이면 백 이상을 쏟아 부으니 계속 허기지고 계속 먹게 되는 것일 게다. 에너지를 쏟는 동시에 또 다른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한다. 커튼콜만큼이나 매력이 강한 연습실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쪽 친구들 중에는 개성 강한 친구들이 많거든요. 많이 부딪히기도 하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자신을 내려놓고 작품 속 인물이 돼요. 충돌이 있어도 하나씩 맞춰가죠. 결국,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그 과정의 매력이란…."

흔한 수식일 테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한 사람만을 향한 눈빛과 감정. 이성일은 연극의 매력과 연습 과정을 설명하면서 내내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연극을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말했다. 자기 속의 무언가를 말하고 표현해야 하고, 그걸 못하면 답답해 못 견디는데 자신은 이를 연극을 통해 해소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이해하고 진정성을 담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가가 그에겐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실 그는 영화에도 심심치 않게 얼굴을 내밀었었다. 2003년 개봉해 조인성과 김사랑이 주연을 맡았던 <남남북녀>에서 민철역을 했고 <목포는 항구다>에도 출연했다. 이렇듯 영화나 드라마, 국립극단이나 상업 연극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무언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서 불편했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호흡이 짧게 가야 하는데, 저는 주위에서도 그렇고 제 생각에도 호흡이 긴 연기가 더 편하고 잘 드러나거든요. 국립극단은 말 그대로 이쪽에선 정규직인 셈인데요, 아휴 안정적이죠. 물론 훌륭하고 좋은 작품과 배우들인데 아무래도 표현하고 담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상업연극도 마찬가지고. '난 절대 안 해'라기보다는 스스로 안 맞고 힘들어하는 걸 아니까 아무래도 잘 안 하게 되죠."

"결혼 물론 하고 싶지만... 그보다 극장을 갖고 싶어요"

a  "연극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끔이 아니라 매번 해요. 그래서 행복하죠."

"연극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끔이 아니라 매번 해요. 그래서 행복하죠." ⓒ 황규백


"물론 저도 안정적이게 벌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고 싶기도 하죠. 그런데 연극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력이 커요. 그런 삶을 살자면 연극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비교도 못 할 만큼 연극이 좋아서."

지금 그에게 연극은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가장 우위에 두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다. 삼십대 중반을 넘긴 이 배우는 '모든 걸 다 누릴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버는 아들인 동시에 연극을 할 수는 없었고, 안정적 수입원이 들어오는 연기는 그가 하고 싶은 연기와 충돌하기 마련이었다.

곳곳에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가득했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그는 편하고 안정적인 것보다 그 자신이 원하는 것, 아스팔트가 아니라 울퉁불퉁하더라도 그가 걷고 싶은 길을 택했다.

"연극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끔이 아니라 매번 해요. 그래서 행복하죠."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행복의 기준이 아니라 '행복이란 원래 다 다른 것 아니냐, 그렇다면 이런 행복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다르게 생긴 것만큼 바라는 바도 행복을 느끼는 것도 다 다르다는 사실을. 배우 이성일은 매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행복해하는 바를 택하며 그의 행복을 쟁취했다.

"그런데요… 정신적인 행복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밥은 먹어야죠."

그와의 대화 중 처음으로 서글한 웃음 대신 어두운 표정을 봤다. 순수 예술을 하는 이들의 복지문제 때문이다. 고용보험, 산재보험, 건강보험.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이들에게만큼은 예외라고 한다. 아파도, 다쳐도, 아무런 보장도 혜택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 돌아가신 한예종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있잖아요. 휴… 그게 절대 남 얘기가 아니라니까요. 마찬가지인 거죠 모두들."

모두들 비슷한 상황에서 나라의 지원 없이 모든 것을 개인이 감당하고 있다. 그도 예외는 아니기에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선택인 것이다.

"결혼 물론 하고 싶죠, 아내와 아이들도 좋죠. 그런데 그보다 극장을 좀 갖고 싶어요."

마지막 목표 역시 연극과 관련 있는 대답이다. 예술은 다양성이 생명인데 그런 연극들이 존재하기에는 극장 대관료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장르의 작품들이 무대 위에 올려지고 관객들에게 보일 수 있는 극장을 갖는 것이 그의 꿈이다.

더불어, 답이 딱 나오는 연기가 아닌 관객들이 보며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는 연기를 하는 것, 무엇보다 지금 이대로의 자신이 최대한 안 변하는 것, 그것이 이성일이라는 배우가 끝내 지키고 싶은 것이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그는 연극과 연극을 하는 자신을 사랑하며 행복해하는 결국, '배우'였다.
#이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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