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이용하여 '봄 수업'을 했습니다. 봄 수업이란 학생들에게 계절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계절수업입니다.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보게 합니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한 학생이 쓴 글을 읽어보다가 한 순간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문맥이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수업도 너무 재미없고 시'도' 너무 잘 쓴다니요.
요즘 노안 때문인지 나른한 날씨 때문인지 눈에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눈을 자주 비비게 됩니다. 가끔은 글씨가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그 바람에 글자 한 자가 잘못 읽힌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있'자가 '없'자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대강 상황을 짐작하시겠지요? 어쨌거나 그렇게 한 차례 해프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바로 이 글 때문이었습니다.
학기 초에는 반장도 하고 제법 잘 나가던 녀석이었는데 반장을 그만 둔 뒤로는 학년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봄 수업 시간에도 책상에 엎드려 자기에 깨워서 기어이 뭔가 적어보게 했더니 이런 글을 쓴 것입니다. 제가 전문계고(지금은 특성화고)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보니 이런 안타까운 글을 종종 접하긴 합니다. 하지만 종종 접한다고 해서 그 안타까운 마음에 내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글을 읽다가 '딴 사람 생각이 궁금하다'라고 쓴 대목에서 제 눈길이 잠깐 멈추었습니다.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겠지만, 딴 사람 중 한 사람인 제 생각을 녀석에게 말해주고 싶었고, 짧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타자를 치는 속도로 급하게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에게
안녕!
나, ET야!
너의 글을 읽고 꼭 말해 주어야할 것이 있어서 몇 자 적는다.
첫째, 넌 멋진 놈이야. 난 처음부터 그걸 느꼈지.
넌 무슨 짓을 해도 귀여운 거 있지.
요즘 많이 힘들어 하는 모습 보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언제 길게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내가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두 번째 말은
넌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거야.
다만, 아직 너 스스로 너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야.
널 위로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만의 소중한 가치가 있는 법이지만
특히 ◯◯이 너에겐 뭔가 말로 하기 어려운
귀엽고 생기 넘치는 멋이 있어.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야.
공부를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지금은 네가 학생이라는 사실도 중요해.
학생은 뭔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지. 꼭 학교공부가 아니라도
뭔가 너에게 필요한 것을 익히고 배우는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지.
돈을 벌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니야.
선생님은 너보다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니까
내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좋을 거야.
우리 인생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뭔가가 있어.
그것은 사랑일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나만의 개성일 수도 있고 그래.
그런 것이 없이 돈만 버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 거야.
물론 선생님 생각이 다 옳은 건 아닐 거야.
우선, 네가 3월 초에 보여준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네가 학교가 싫다고 해도 학교를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야.
네 삶을 다른 삶과 바뀌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렇다면 지금의 너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해.
지금 담임선생님 참 좋은 분이야. 담임을 맡다보면 말썽을 피우는 네가 귀엽게 보이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조금만 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면 선생님도 너를 보는 눈이 달라지실 거야. 한 번 노력해보자. 너를 사랑하는 영어선생님이 곁에서 도와줄게! 그럼 나중에 또 길게 얘기하자.
-◯◯이를 무지 좋아하는 영어선생님이 씀.
다음날 수업이 있어서 교실에 들어가 보니 녀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출석부에도 결석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학교는 왔는데 담임선생님과 면담한 뒤로 학교를 나갔다고 했습니다. 담임교사에게 자퇴를 요청한 듯싶었습니다. 조금은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타자를 치는 속도로 급하게 편지를 써서 그의 손에 쥐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편지 내용이야 그렇고 그렇지만 말입니다. 녀석이 빨리 학교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봄 수업 시간에 써서 낸 학생들의 중에는 깜찍한 재치와 지혜가 엿보이는 풋풋한 내용도 많았습니다. 한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아 학교를 그만 두나 싶어 가슴을 졸였던 한 여학생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아픈 속내가 느껴지면서도 끝내는 저를 환히 웃게 만들었지요.
봄아, 네가 참 부럽다.
봄아, 봄아, 난 네가 참 부럽다.
힘든 시기를 버티고 새싹을 틔우는 네가
난 네가 참 부럽다.
난 언제쯤 새싹을 틔울까?
내 봄은 언제쯤 올까?
지금 푸른 새싹을 틔우고 있는 네가
난 네가 참 부럽다.
언젠가 나의 새싹을 틔우는 날
그날을 기다리며
봄아, 난 네가 참 부럽다.
나에게 쓰는 편지
난 날 믿어.
언젠가 다시 변화할 날이 온다는 걸 믿어.
지금도 천천히.. 서서히...느리게...
변화해가고 있어. 그래서 모르는 걸 수도 있어.
너무 변화가 늦게 와서..
하지만 변하고 변해서 언젠가
새로운 나로 다시 살거라 믿어.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다음의 나를
위해, 변화할 그 언젠가를 위해.
오늘을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자.
E.T
선생님, 그동안 제가 수업을 받은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선생님께서
정말 쉽고, 재밌고,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셔서 이번 시험에서 정말 좋은 점수를 맞았어요.^^
앞으로는 수업도 빼먹지 않고 더 열심히 해서 더 잘해볼게요!
항상 저는 잘 할 거라고 믿어주신 E.T. 선생님 감사합니다.
ET가 'English Teacher'의 약자라는 건 아시겠지요? 마지막으로 남학생이 쓴 '나에게 쓰는 편지'를 하나만 더 소개할까 합니다.
나에게 쓰는 편지
나 자신에게 아직도 미안하다.
자꾸 아파서 미안하고 무슨 일이든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미안하고 하여튼 미안하다.
이런 나를 잘 아는 나에게 항상 고맙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도 곁에 있고
나쁜 일이 있어도 같이 있는 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나를 관찰하는 그런 아이.
앞으로 잘 부탁 해.
사실은 이런 글을 쓰게 하기 위해서 봄 수업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늘 '나'를 관찰하는 '나'와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말이지요.
저도 저에게 이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나야, 앞으로 잘 부탁해."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