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 지 서로 의견을 교환한 정도다. 여기서 (민주당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4일 오후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고 돌아 온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야권연대 회복 여부에 대해 말끝을 흐렸다. 정부·여당과 민주당이 지난 2일 한-EU FTA 비준동의안 처리에 합의한 것에 대한 사과를 받았냐는 질문에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정도"라며 구체적인 말을 아꼈다. 민주당이 야4당(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의 4.27 재보궐선거 정책연합 합의문을 무시한 것에 대한 섭섭함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한-EU FTA에 대한 민주당의 '갈지자' 행보가 가져온 후폭풍이었다. 민주당은 이날 본회의를 보이콧하면서 한-EU FTA 비준동의안 처리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의장석을 점거했던 진보정당의 시각과는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비공개 의원총회 마무리 발언에서 "우리의 요구는 한나라당에 대해 오늘 심의하지 말고 좀 더 시간을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의원총회 산회 직후 "야3당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이해관계가 있는 단체들에게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민주당의 입장을 부연했다.
야4당 정책합의문에 명시된 "한-EU FTA에 대한 근본적 재검증"이 아니었다. 사실상 비준안 처리 시점에 초점이 맞춰진 반대였다. 민노당의 한 관계자는 "야4당 정책합의문에 따르자면, 민주당은 야3당에 '설명'을 하는 게 아니라 '협의'를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를 볼 때, 민주당의 한-EU FTA 비준안 합의처리 방침은 결코 우발적인 일이 아니었다. '여·야·정 합의'의 주역인 박 원내대표 역시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결정은 책임 있는 야당이 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저녁 기자간담회에서도 "후임으로 처리를 넘길시 저쪽(한나라당) 후임자가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있다"며 "내가 좋은 소리 들으려면 반대하고 이번에 처리 안 하고 넘기면 되지만 이번 합의안은 95% 이상 우리가 받아낸 것이다, (의원들도) 내용에 대해 누구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당 핵심관계자도 "박 원내대표는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것 같다"며 "(박 원내대표는) 이 정도 내용이면 처리를 해야하고, 이마저도 안하면 한나라당의 단독처리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또 "손 대표의 중도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는 것 같다"며 "자기가 총대를 멘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박 원내대표의 소신은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좌클릭' 선언과 야권연대에 대한 진정성을 크게 해친 셈이 됐다.
이 때문에 이날 잇달아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선 '야4당 공조'와 '당의 노선'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손학규 대표도 비공개 의총에서 "밖에서 민노당·진보신당 대표가 농성하고 있는데 우리가 야4당 정책합의에 대해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점은 유감"이라고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춘석 대변인은 "협상실무단이 최선의 방침을 내기 위해 노력한 것 같지만 야권연대 부분까지는 헤아리지 못한 것 같다"며 "의원들 상당수도 어려운 상황에서 합의를 잘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야권연대를 챙기지 못한 실수를 지적했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달했다.
천정배 최고위원은 "한-EU FTA 합의처리 방침은 야권연대 파기뿐만 아니라 당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라고 규정했다. 그는 "4.27 재보선 이후 당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며 "중도를 포용하고 한나라당과 비슷한 노선을 걷느냐 아니면 야권연대로 갈 것인가의 문제 중 (협상단이) 후자를 선택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수파(정부·여당)가 작은 떡이라도 주면 소수파인 야당이 그냥 합의해줘야 하는 것이냐"며 "우리가 한-EU FTA 비준동의안 처리의 들러리를 서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야권통합론 힘 잃을 듯... "민주당, 정책연합 요식행위로 인식한 것"
민주당이 내년 총·대선 야권연대에 앞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진짜 연대'가 무엇인지 배웠다는 평가도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야권연대 합의의 구속력이 발휘된 경우"라며 "정부·여당과의 합의를 어긴 셈이지만 '야합'으로 비춰지진 않아 차라리 다행이다, 당이 정책연합의 중요성을 학습했다는 것도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박용진 진보신당 부대표는 "진보정당이 민주당 내 어느 세력과 함께 가야 할 지 분명히 드러난 셈"이라며 "이번 사태가 앞으로의 야권연대 과정에서 중요한 가늠자가 돼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부작용은 만만치 않다. 당장 4.27 재보선 이후 활발히 논의됐던 통합 및 연대·연합 논의가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더욱이 정동영·천정배·이인영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 상당수가 주장한 야권통합론은 이번 과정에서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며 그 명분을 잃게 됐다.
▲4일 밤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 단독으로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강행처리하자 민주노동당 권영길 강기갑 의원과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 등이 박희태 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남소연
▲ 4일 밤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 단독으로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강행처리하자 민주노동당 권영길 강기갑 의원과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 등이 박희태 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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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구 진보신당 대변인은 "민주당이 야권 정책연합을 요식행위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향후 총·대선 야권연대에서 후보조정보다 정책연합 자체가 더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야권연대에 있어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이 생겼다고 보면 된다"고 평가했다.
우위영 민노당 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통해 "애초부터 4.27 재보선 결과에 자만하지 않고 야권연대 정신에서 겸허히 출발하여 다른 야당과 충분한 협의를 선행했더라면, 민주당의 패착은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야권연대는 자리 나눠먹기식의 앙상한 후보단일화가 아니다"며 "서민의 이익과 진보적 가치에 기반한 정책연대야말로 야권연대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하다는 것을 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2011.05.05 09:42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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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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