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에 진열된 제7기병대 군인들이 입었던 군복과 사용했던 총.
박지호
그래서일까. 오두막 같은 샌드크릭 학살 기념관과 건물 규모부터 달랐다. 영화 상영관에 소규모 전시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전시실에는 관람객을 위해 자세한 안내문도 준비되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와시타 학살의 원인이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1850년부터 1860년대까지, 4개의 조약을 샤이엔과 아라파호 부족과 맺었다. 정부는 부족들을 백인들이 자주 다니는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하려고 했다. 하지만 평화 조약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문화적 차이가 근본 원인이다. 예를 들어, 인디언에게 통역을 해주는 과정에서 오역이 되어서 잘못 전달되기도 했다. 또 부족 추장들이 조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몇몇 추장들만 조약에 서명했다. 정부가 조약을 완전히 체결하지 못했고, 약속한 식량과 물품을 제공하는데 실패해서 인디언들의 의심을 유발시켰다."안내문만 보자면,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조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추장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이 촉발된 것처럼 보인다.
전시실 안내문에서 검은주전자는 "평화의 추장"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1861년부터 1867년까지 그가 서명한 평화조약만 3개나 되니,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추장'이 죽어야 했던 이유와 3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살육을 저질렀던 미군의 잔혹함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어 있었다. 검은주전자를 소개하는 문구가 차라리 정중한 조롱에 가깝게 여겨진 이유다.
조약을 체결했지만 "그가(검은주전자) 모든 샤이엔 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일부 젊은 전사들이 보호구역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기 때문이란 언급도 했으니, 와시타 학살의 책임이 샤이엔족의 철없는 젊은이들과 조약을 성실하게 알리지 않은 무능한 추장에게 있었던 셈이다.
학살에 대한 성찰과 반성보다는 인디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한다는 느낌이 강해서였을까, 현장을 돌아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와시타 학살 사건은 전쟁이 아닌, 인디언 소탕 작전이었고, 그 결과는 학살로 이어졌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