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고양이가 울고 있다. / 세상 밖은 아날린처럼 어지럽다 / 한 마리 벌새가 날아와 어둠 속에 집을 짓는다 / 세상 밖은 여전히 불청객이다."
시인 김자흔이 '시인의 말'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왜 '고장 난 꿈'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물음표가 술술 풀린다.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지니고 가야 할 그 꿈이 고장 난 것은 아니다. 그 꿈은 핑크빛보다 더 곱고 아름답게 빛났다.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직 이 세상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철없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인이 자라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이 세상을 조금씩 더듬기 시작하면서 그 핑크빛으로 빛나는 꿈은 하나 둘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시인이 철이 들고 이 세상을 더욱 깊숙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이 세상은 '아날린'처럼 어지럽게 흥청망청 출렁인다.
그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치 초청하지 않은 손님이 내 마음 속으로 불쑥 찾아와 자기 안방처럼 에헴! 하며 드러눕는 것처럼 깊은 상처를 입힌다. 까닭에 어둠 속에 집을 짓는 '한 마리 벌새'는 시인 자신이며, '어둠'은 이 세상에 다름 아니다.
광화문 사거리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나는 당신에게 꽝 꽝 꽝 내 마음을 찍어대고, 올 듯 말 듯 당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나는 기다림이 무서워 펄떡거리는 내 심장을 꺼내 길바닥에 펼쳐놓고, 여긴 뜨거운 무덤 속이에요 수증기가 자욱이 깔려 있죠 낮은 목소리로 내가 웅얼거릴 때, 당신은 이제 막 졸린 눈곱을 떼내면 느릿느릿 내 심장을 곁눈질하고,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자신이 없는가 생각할 때 지하도 공사판 기계가 파르릉 소릴 내지르고 내 젖은 눈썹 위로 푸른 낮달이 흐르고, 나는 숨을 곳을 더듬거리다 기어이 공중전화기 속으로 몸을 숨기고, 오만한 당신이 느리게 나타났을 때 나는 내 작은 몸을 돌돌 말아 구멍 속에 더 깊이 숨겨놓고, 늘 그랬듯이 당신은 눈 한 번 꿈쩍 없이 뜨거운 입김 하나로 아주 쉽게 숨은 날 찾아내고, 엉뚱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라서 날 좀 안아
줘요!
당신의 심장 속에 무례하게 날 가두어 버리는 당신은 당신은-'사랑에 관하여' 모두
첫눈에 번져 있는 저 순결한 피비린내로 찍은 시
시인 유용주는 "여자의 다리는 우주의 자궁이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이쪽과 저쪽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건넌 이쪽 세계는 피안이고 건너기 직전 저쪽 세계는 아수라인가"라며 "아버지를 낳은 딸과 아들과 결혼한 어머니와 손자의 딸인 할머니가 뒤엉켜 피를 흘린다... 첫눈에 번져 있는 저 순결한 피비린내!"라고 김자흔 시세계를 아프게 파헤쳤다.
시인 조정은 "김자흔이 쓴 시는 칼질이 휙휙 살아 있는 판화로 삽화를 삼아야 할 것. 그 삽화 뱃가죽은 지그시 누르기만 해도 '삶은 박 속'같은 내장들이 무한대 비어져 나올 것. 첫 시집 사육제를 위해 독자들은 식탁에 둘러앉을 것"이라며 "(김자흔이 마련한 식탁에서 불에 익힌 음식을 찾기는 어려울 듯)"이라고 씨줄 날줄을 더듬는다.
그는 "후식으로 마련한 '연골 웰빙 푸딩'까지 먹은 포만감에 지치거든 비명횡사한 아버지를 '개기름 뻘뻘 흘려가며' '통째로 복달임' 중인 그의 잠긴 문을 두드릴 것"이라며 "시인의 얼굴을 재빨리 감추며 '그런데 어떻게 네가 알고 찾아왔을까' 흔연히 문 열어주는 그의 팔을 베고 누울 것... 네 늑골을 박박 긁는 '활'이 되고 싶다고 유언 같은 잠꼬대를 독후감으로 속삭여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시인 김자흔은 "이렇게 제 처녀 시집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설레였고 출간된 시집을 받아들고는 두근거렸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편으로 시집에 대한 책임으로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작품 순서 배열을 야무지게 하지 못한 점은 후회스럽습니다"라며 "(그게 아주 심한 독감 때문이었다면 무책임한 말이 되겠지요) 이제 평가 몫은 독자"이라고 속내를 수줍게 내보였다.
김자흔 첫 번째 시집 <고장 난 꿈>은 불청객인 이 세상이 시인과 시인을 둘러싼 가족들에게 입힌 깊은 상처가 남긴 멍에다. 시인은 그 멍에를 보듬고 다시 어둠만 가득한 이 세상에 작은 촛불 하나를 밝힌다. 아무리 이 세상이 얄밉고 저만치 내동댕이치고 싶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까닭은 시인과 그 가족, 이 세상 사람들이 아등바등거리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그 자리가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자흔은 196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2004년<내일을 여는 작가>신인상에 '사랑에 관하여' 외 3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풀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은 '주름진 방'이라는 시에서 "상처 난 영혼들을 위해 / 나는 나만의 방을 준비해 두고 싶었다 / 주름진 벽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 나만의 비밀열쇠를 간직하고 싶었다"고 쓴다. 시인 스스로 고장 난 꿈을 고치기 위한 방이 곧 '상처 난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1.05.11 17:56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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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꿈
김자흔 지음,
문학의전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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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꿈, '시'란 바늘과 '시인'이란 실로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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