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출판사가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효종의 북벌정책을 실제 사실처럼 다루고 있다.
모 출판사
효종이 북벌정책을 추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있다. 효종 10년 3월 11일(1659.4.2) 효종과 송시열의 단독회담(독대)이다. 하지만, 실제로 회담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을 근거로 북벌론을 도출하는 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 회담은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과 여당대표의 영수회담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이조판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집권여당인 서인당의 총재였다. 회담의 목적은 꼬일 대로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해서였다.
당시 효종이 추진하는 중앙군 확충정책으로 인해 주상(왕의 공식명칭)과 여당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다. 여당이 중앙군 확충에 반대한 것은, 중앙군을 확충하자면 세금을 더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부유층이 돈을 더 많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송시열이 중심이 되어 효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했고, 효종은 어떻게든지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송시열과 효종은 개인적으로는 사제지간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렇게 서로 으르렁대는 관계였다. 회담이 열린 것은 그런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회담의 내용이,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서습유> 권7 '악대설화'에 실려 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담에서, 효종은 자신이 군비를 증강하는 목적은 실은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며 "10년만 준비하면 청나라를 꺾을 수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효종이 처음으로 북벌론을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송시열은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이라면서도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라고 신중론을 피력했다. 총론에는 찬성, 각론에는 반대였던 것이다.
송시열이 반대 입장을 나타냈는데도 효종은 집요하게 자기 입장을 개진했다. "하늘이 내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관계없이 한번 거사해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오."
송시열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신은 결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이 "우리 반미를 해봅시다"라고 하자 여당 대표가 "천만의 말씀! 저를 그렇게 보셨습니까?"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효종-송시열 단독회담에서 처음으로 나온 '북벌론'송시열이 반대입장을 피력한 것은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효종의 북벌론이 군비강화 및 왕권강화를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청나라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10년 뒤에 칠 테니 그동안은 잠자코 나에게 협조해달라고 말했으니, 송시열로서는 효종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었으니 누구보다도 효종의 마음을 잘 읽지 않았을까.
송시열의 태도가 강경하다는 것을 확인한 효종은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급선무인지 말해주시오." 그러자 송시열은 격물·치지·성의·정심을 통한 마음공부가 가장 급선무라고 대답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것으로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 치지(致知)는 무궁한 단계까지 지식을 확장하는 것, 성의(誠意)는 마음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또 정심(正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송시열의 말은 '치국평천하'에 앞서 '격물·치지·성의·정심'부터 하라는 것이었다. 군비 증강을 주장하는 임금 앞에서 "마음공부나 하시오"라고 말했으니, 사실상 임금을 조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방 얻어맞은 효종은 북벌론 같은 것을 더는 내세우지 않고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 뿐이오"라며 다시 한 번 협조를 구했다.
송시열의 답변은 이랬다. "먼저 기강을 세운 뒤라야 이 법(군비증강 관련 제도)을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을 세우는 길은 전하께서 사심을 없애는 데 달려 있습니다." 군비증강에 앞서 사심이나 없애라는 말이었다. 당신이 군비증강을 추진하는 진짜 목적은 북벌이 아니라 왕권강화가 아니냐는 메시지였다.
기분이 틀어질 대로 틀어진 효종은 "경은 말끝마다 주자를 거론하는데, 몇 년 동안이나 주자의 글을 읽었기에 이처럼 잘 아는 것이오?"라며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어렸을 때부터 읽었죠"라고 답변했다.
이날의 비공개 영수회담은 이렇게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감되었다. 서로 간의 입장차만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상하게 만든 회담이었다.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한 자리가 도리어 정국을 더 꼬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