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 확실' 보도 이후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민주당사에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권양숙씨.
마이너
그 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 한 명 잘 바꾸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던 것이 너무나 순진했던 것일까.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부에서는 쿠데타라는 말이, 정치권에서는 탄핵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렸고, 평검사들은 대화를 원하는 대통령에게 대들었다.
대형 언론사들은 정체불명의 경제위기를 유포하며 하이에나처럼 덤벼들어 실패한 정권 만들기에 혈안이었다. 개혁에 대한 반발은 여당 내에서도 만만치 않았고 정부 안에서도 밖에서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MB 집권 후 얻은 깨달음, 우리 민주주의가 이렇게 허약했구나!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뽑은 데에는 민주주의는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경제를 더 살려서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바람이 크게 작용했다.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바람 속에는 우리의 탐욕이 숨어 있었다. 도덕성에 좀 문제가 있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 속에는, 그런 대통령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죄책감들 - 위장전입이든 부동산 투기든 약간의 탈세든 간에- 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늘 입바른 소리로 국민들의 마음에 불편한 빚을 안겼던 노무현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한 선택인가. 게다가 대기업 CEO 출신이라는 그의 화려한 성공신화는 모든 국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줄 경제전문가로 이명박을 포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그의 경제철학의 귀결점이 어디인가는 자명한 면이 있었다. 1997년 IMF 사태와 2008년의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때 겪었듯이 한국경제가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대외 의존도를 어느 정도 낮출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북한경제를 포섭하여 실질적인 내수시장을 확대하는 것이고 둘째는 고용과 기술혁신의 중추역할을 떠맡고 있는 중소기업을 살리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명박 경제는 이 두 가지 사항 모두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대기업들의 수출을 늘려주기 위해 고환율을 유지한 덕분에 돈의 가치가 하락한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 안았다. 대기업 CEO 출신의 대통령이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곧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극소수의 대기업을 먹여 살리는 것(아직도 우리는 외국보다 비싸게 우리나라 대기업 제품을 쓰고 있다)이라는 점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에서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더구나,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피로 지켜 왔기에 그만큼 굳건하리라고 믿었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훌륭하고 뛰어난 지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기보다, 좀 부족하고 이상한 지도자를 뽑더라도 그것을 제어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제도적 장치가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이른바 '고소영' 사단이 점령한 국가기관들은 본연의 업무보다 철저히 대통령의 수족 노릇에만 열중했다. 이를 감시할 언론은 이미 스스로 권력 기관이 되어 정권의 방패막이로 나서며 '종편 채널'이라는 전리품을 챙겼고 소위 전문가들은 기발한 궤변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으며 정부정책에 대한 반대의견을 무력화시켰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폐해는 국정의 모든 현안에서 증명된 그 무능함(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선발했음에도) 자체라기보다는 무능함을 만회하고 오류를 정정해 줄 민주적 기제의 작동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린 데 있다. 이는 곧 민주공화국의 권력이 사유화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지난 3년간의 이명박 정부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의 실제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 똑똑히 알 수 있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재벌, 스폰서 받은 검사들을 봐주기만 하는 검찰, 법과 양심보다는 전관예우가 앞서는 법조계, 종편을 움켜쥐고 빅 브라더가 되려는 언론, 권력에 기생하는 전문가들…. 하나같이 일제시대 친일로 한몫 잡고 미군정과 독재에 야합하면서 국민들을 핍박하며 기득권이 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조항은 이들 앞에서는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이른바 친노 세력, 시대와 맞서 싸우기보단 그냥 사람들과 싸워노무현은 이들에 맞섰다. 그들에 맞서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국 그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무현은 시대와 맞섰다. 새 시대를 가로막는 구시대, 그 낡은 질서와 싸웠다. 그래서 그가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만 했던 600년의 역사를 청산하자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지 수사적인 레토릭이 아니라 진정성이 담긴 진심이었다. 그 연장선에 있는 수도 이전은 단지 충청권에서 '재미'를 보기 위한 공약에 불과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혹자는 노무현이 이를 비꼬아서 발언한 것을 두고 본심을 드러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아마도 노무현이 다른 정치인들과 가장 차이나는 점은 이 점일 것이다. 친노 계열의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예를 들어 최근의 유시민을 보면 시대와 맞서 싸운다기보다 그냥 사람들과 싸우는 느낌이다. 모두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고 목소리는 높이지만, 정작 이 시대가 던진 화두에 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도 시대와 맞서려고도, 누구도 '조폭 신문'들과 대적하려고도, 누구도 대한민국의 주인 자리를 도적질한 세력과 싸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시대와 맞선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무현 집권 5년의 교훈을 전혀 배울 수 없다. 단지 대통령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 국회의원 다수를 당선시켜 의회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이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출발점(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일 뿐이다. 일제시대부터 그리고 해방된 뒤로 한국사회를 한 세기 넘게 지배해 왔던 기득권 세력이 부당하게 점유하고 있는 주인의 자리를 스스로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대선 승리는 이들과의 지난한 대결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좀더 빨리 뼈저리게 깨달았다면 노무현의 5년이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도 여전히 사실이다.
청와대 입성으로 끝, 꿈 깨!... 세력 교체, 세대 교체 이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