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개항의 중심이었던 인천항. 사진은 1903년 현재 인천항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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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개방이란 화두를 놓고 전 세계가 격렬히 대립한 19세기. 이 시대의 한국인들도 오늘날과 유사한 논쟁을 벌였다. 제26대 고종 집권 당시의 한국인들도 어느 쪽이 국익을 증대시킬 것인가를 놓고 쟁론을 벌였다. 고종을 비롯한 집권여당은 '미국 등 서양열강에게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민간의 주류세력은 '결국 화만 초래할 것'이라며 응수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개방을 늦게 했기 때문에 조선이 망한 게 아니냐?"는 구태의연한 논리는 제기하지 말자. 결과적으로 발생한 일은, 대책 없는 시장 개방 이후 조선이 망했다는 사실뿐이다. 최초 개방(1876년)에서 망국(1910년)까지 34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이 있었으니, 조선은 시장개방을 할 만큼 다 해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방을 안 해서 망했다'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한말에 개방을 하는 게 좋았느냐 안 하는 게 좋았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시장개방을 둘러싼 19세기의 논쟁에서 어느 쪽의 주장이 결국에는 옳았는가 하는 점이다. 정보력이 우세한 정부가 옳았는가, 아니면 통찰력이 우세한 민간이 옳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분석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자료들이 있다. 조선에게 시장개방을 권고하기 위해 청나라 측이 작성한 <조선책략>, 이 책에 대한 고종 임금과 민간 사회의 반응이 그것이다.
1880년 동경주재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이 본국 정부와의 교감 속에 작성한 <조선책략>의 핵심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은 청나라·일본·미국과 연대해야 하며 이렇게 하려면 일단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관계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긴장감을 느낀 쪽은 청나라였다. 전통적으로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던 청나라로서는 북방에서 다가온 러시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조선과 러시아가 한편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은 청나라·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선책략>을 작성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하필이면 미국을 추천한 이유는, 미국이 당시로서는 꽤 '선량한 국가'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동아시아를 가장 악랄하게 침탈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프랑스였다. 영국이 어떤 나라인가는 아편전쟁(1840)에서 잘 드러났고,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가는 병인양요(1866)에서 잘 드러났다. 또 청나라 황실의 정원인 원명원(웬밍웬)이 영국·프랑스 병사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된 현장을 목격하노라면, 19세기에 이 두 국가가 어떤 나라였는지 절감할 수 있다.
그들과 달리 미국이 유독 선량하게 보였던 것은, 그때만 해도 미국에게 별다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오늘날로 치면 G8 정도에는 해당했지만, 세계 최정상급은 아니었기 때문에 약소국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히지는 못했다. <조선책략>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미국은)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 …… 항상 약소국을 돕고 공의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오늘날 같으면 콧방귀가 나올 만한 소리들이지만, 청나라는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조선에게 이런 식으로 미국을 소개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소개팅'을 주선했던 것이다. 뺨 맞을 만한 일이다.
청나라의 <조선책략>을 읽자마자 미국에 반한 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