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량 묘동작동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김홍량의 묘. 서훈이 최소되면 묘소도 이장해야 한다
정운현(1996.5.30 촬영)
그런데 그는 왜 건국훈장 서훈이 취소됐을까요? 위의 공적내용들이 모두 허위일까요? 아닙니다. 위 내용은 대부분 <백범일지>에도 기록된 것으로 모두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바로 '그 이후'의 그의 행적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보훈처 등에서 언급한 그의 활동 내역에는 독립운동 관련 부분만 언급돼 있고 그가 가출옥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관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한글판)와 <경성일보>(일어판), 그리고 민간지 <동아일보>와 <삼천리> 등 잡지, 그밖에 일제 당시 발행된 <신사록(紳士錄)>(일종의 '인명사전'임) 등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가 1915년 10월 가석방된 이후 해방 때까지의 행적이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항일이 아닌 친일과 관련한 기록입니다. 친일연구가 고 임종국 선생이 이미 80년대에 이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였고, 필자도 이를 근거로 몇몇 글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 기관에서는 이를 그간 외면해 온 겁니다.
이번 '서훈 취소'를 촉발시킨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내용은 임종국 선생의 연구를 토대로 보강한 것으로, 모두 정확한 출처와 근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친일로 볼 수 있는(혹은 유사한) 김홍량의 행적을 몇 가지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받음(1928년 1월)2. 조선박람회 평의원 임명(1929년 5월)3. 육군지원병훈련소 환자 수송용 자동차 구입비 2000원 헌납(1939년 12월)4. 황해도 신천경찰서 건축비 1000원 헌납(1940년 6월)5.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 및 봉축회 초대 및 기념장 받음(1940년 11월)6. 황해도 도회 부의장 피선(1941년 6월)7. 임전보국단 발기인(황해도) 참여(1941년 9월)8. 황해도 지주보국회 통해 30만 원 모금하여 지주호 2대 헌납(1941년 11월)9. 황해도양곡배금조합 대표로 조선군 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 원 헌납(1942년 1월)10. 국민총동원총진회 이사 임명(1944년 9월)황해도 안악 지방의 재력가였던 그는 독립자금 모금에도 참여하였지만 그는 반대편, 즉 일제 측에도 적잖은 돈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본군 군용 차량 구입비나 경찰서 건축비, 그리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투기 헌납금도 여러 번 냈군요. 그런 공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황해도 도회 부의장과 같은 지역유지 '감투'를 썼으며, 그 연장선에서 여러 친일단체에서 간부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다 소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는 일제에게 포상도 더러 받았더군요.
이것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김홍량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걸렸다거나 혹은 가족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해 불가피하게 한 두 차례 친일 대열에 선 것은 백 번을 양보해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칩시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李秉岐)가 일제말기에 친일성향의 시('12월 8일', <매일신보>, 1943. 12. 8) 한 편 쓴 것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친일인명사전>에 가람 이병기는 제외돼 있습니다)
그러나 김홍량은 사정이 다릅니다. 적어도 1920년대 중반 이후, 즉 가석방된 지 10년이 넘어서부터 그는 완전히 친일대열에 서고 맙니다. 위 독립기념관 자료에도 가석방 이후 그의 행적은 전혀 언급돼 있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제 당시 그의 전반부 삶은 '민족' 진영에 서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후반부는 '반민족' 진영에 서 있었음도 분명합니다. 이는 그에 대한 음해나 모략이 아닙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고 모두 공개된 자료에서 확인한 것들입니다.
김홍량 유족의 주장, 조목조목 반박하겠습니다그의 4남 김대영씨는 <중앙일보>(2011.5.17)와의 인터뷰에서 당국의 조치에 대해 불만과 서운함을 피력했더군요. 자식으로서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 반박해 보겠습니다. [참조-
"아버지 서훈 취소를 취소해 달라" 첫 행정소송]
첫째, 김씨는 소장에서 "서훈 취소하려면 1.서훈 공적이 거짓이거나 2.국가 안전에 관한 범죄로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3.형법·관세법·조세범처벌법으로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여야 하는데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참고로 위 3개 항은 상훈법 8조에 규정된 것으로, 서훈 취소의 근거 규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김씨 주장이 맞을까요? 아닙니다. 김홍량은 3개항 가운데 바로 제1항, 즉 '서훈 공적이 거짓이거나'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의 기존 공적조서에는 독립유공 공적내용만 언급돼 있을 뿐 후반부의 친일행적에 관한 사항은 전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반쪽' 공적조서였기 때문에 '거짓'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참고로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변절 여부'를 확인하는 난이 별도로 있는데, 1977년 공적심사 때 보훈처가 이를 소홀히 한 셈입니다.)
둘째, 김씨는 "근거 자료인 <매일신보> <경성일보> 기사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꼭 맞는 지적은 아닙니다. 김씨의 주장대로 이들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에 100% 믿기 어려운 대목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김홍량과 관련한 내용은 논설이나 주장이 아니라 인사발령, 행사, 포상 등 구체적인 사안(fact)과 관련한 것이어서 <관보> 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할뿐더러 특히 이 신문들은 독립유공자 공적 확인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 "아버님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하신 분"이라고 한 대목 관련입니다. 김홍량이 창씨개명을 했다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그런 자료가 나올지도 모르니 자식인 김씨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를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습니다. 아울러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파가 아니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친일거두인 한상룡이나 박흥식, 그리고 도지사를 지낸 김대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가 창씨개명은 강요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이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 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