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남산동은 대구 천주교의 발상지로서, 교구청, 수녀원, 성모당 등이 어우러져 거대한 가톨릭 타운을 이루는 동네다. 이곳에 위치한 성모당(聖母堂:대구유형문화재 29호), 성유스티노신학교(대구문화재자료 23호),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코미넷관(대구문화재자료 24호) 등의 문화재는 천주교를 통한 대구 근대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국 천주교 신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중 성유스티노 신학교(聖유스티노神學校) 는 일제강점기의 한국 천주교 역사를 알려주는 역사적 장소이며,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이 1930년대에 신학 공부를 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권상우, 하지원 주연의 영화 '신부 수업'의 촬영지로도 이름을 올린 아름다운 건축물의 학교로 알려져 있다.
성 유스티노의 웅장한 건축물에는 선교사와 독립운동가, 난세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신자들의 노력이 담겨져 있다. 대구 천주교회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주(한국명 안세화) 신부가 중국인 벽돌기술자를 동원해서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한 이 곳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 가까운 서구식 벽돌 건물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는 서구의 근대 건축양식과 벽돌제조 및 조적 기술을 대구에 소개한 것에 큰 의의를 가지며, 대구 천주교 역사를 담고 있다는 데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거대하고 장엄한 스케일과 넓은 잔디밭은 대구 근대 건축물의 최고점을 보여준다.
이 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립자 플로리앙 드망주 [Florian Demange, 1875~1938.2.9]에대해서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말 한국에 와서 활약한 프랑스 신부로서, 1906년 '경향신문' 창간과 함께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한국 개화기 언론창달에도 공헌하는 등 조선 개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대구 경북, 경남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루어놓은 천주교 역사는 프랑스에서의 훈장 수여로 이어지게 했다.
1912년 드망주 신부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였던 프와넬 신부를 초청하여 건립계획을 세우고,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이후 1913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익명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보내오고, 대구의 독립운동가이자 천주교 신도인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해서 학교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했으며, 책임 목수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공부한 김수환 추기경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 성유스티노 신학교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김 추기경은 성유스티노에서 고독한 사춘기를 보냈다고 한다. 때론 집이 그리워 학교를 도망쳐나올 궁리도 했는데, 그 묘안으로 동전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돈을 지니는 것을 매우 엄격히 제한 했기에 퇴학을 당할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동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사제의 길이라고 나름 해석하기도 했다 한다.
현재 성유스티노 신학교의 공식명칭은 대구 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캠퍼스다. 1914년 개교한 유스티노 신학교를 전신으로 가톨릭 사제와 의료인을 양성해 온 대구가톨릭대학교와 1952년 효성여자초급대학으로 개교하여 1980년 종합대학으로 발전한 효성여자대학교가 1994년 학교법인 선목학원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00년 5월 대구가톨릭대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렀다.
건축 후 100 년간 여자의 출입이 통제 됐던 학교 기숙사와 더불어, 학교 내에 여성이 입장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수업을 마친 신학생들이 장렬한 걸음으로 캠퍼스를 가르며 나오는 그 시간을 피해서 학교를 둘러본다면 이 곳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를 음미 할 수 있다.
2011.05.29 10:18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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