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씨. 현재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 두 아들의 엄마이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거실바닥에 세계지도를 쫙 펴고, '어디가고 싶니?'라고 묻는다. 아이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려 한다.
안소민
은영씨는 여행갈 때 몇가지 원칙을 세운다. 첫째, 여행 행선지는 아이들과 토론해서 결정할 것. 둘째, 행선지까지 가는 교통수단, 숙박시설, 스케줄 등 모든 것을 아이들과 상의한다.
기자(이하 파란색) : "아이들 의견을 존중하는 건 좋지만, 여행 일정 하나하나까지 토론하려면 너무 힘들지 않나요? 여행가기도 전에 지칠 것 같은데요."은영(이하 갈색) : 저는 아이들을 믿어요. 아이들이 어른에 비해 조금 미숙할 지는 몰라도 아이 의견을 존중하고 귀 기울이면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타당하고 합리적인 의견들을 내놓거든요. 사실 엄마 아빠가 결론을 내려주는 편이 쉽고 편하긴 하다. 대신 많은 걸 놓칠 수 있다. 은영씨도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었다. 3년 정도 부모교육을 받으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05년, 홍콩을 다녀온 뒤 2007년, 은영씨가 아이들과 두 번째로 여행을 다녀온 곳은 일본과 유럽여행이었다. 일본에 간 이유가 조금 엉뚱하다.
"여행을 가기 전, 지도를 펴놓고 두 아이들에게 물어보죠. '이번에는 어느 곳으로 갈까? 어디가고 싶니?'라고 묻자 둘째가 '일본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본 라면을 먹기 위해 일본에 갔죠. "오직 라면을 먹기 위해서 일본을 선택했어요?""네. 먹고 싶다니까 먹어야죠. 그것도 여행책자에 나온 꼭 그 집 라면을 꼭 먹고 싶다고 하더라구요.""일본은 영어가 잘 안 통할 텐데 어떻게 잘 하셨나요?""고생했죠. 일본어 안 되고, 지리는 모르고… 그렇게 세 시간 동안 헤맨 끝에 결국 찾아냈죠.""무슨 라면이었는데요?""그냥 종류별로 다 시켜봤어요, 소금라면, 미소라면, 쇼유라면 등" "맛은 어땠나요?""반도 못 먹고 나왔어요. 입맛에 안 맞더라구요."이만하면 여행 본전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고생하면서 갔던 라면기행이 만족은 커녕 실망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라면 맛'이 실망스럽단 얘기다. 그 라면집을 찾으러 가는 길은 고달펐지만 즐거웠다. 일본 택시 뒷문이 자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꼭 한 번 택시를 타보고 싶다고 해서 거금을 주고 택시를 타기도 했다.
"제가 잡은 두번째 여행의 테마는 이겁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하는 그대로 한번 실천해보자'는 것이었어요."이만하면 과감하다 못해 무모할 정도다. 설령 결심은 그렇게 야무지게 했다치더라도, 돈 들여 일본까지 갔는데 이런저런 욕심이 나지 않았을까. 가봐야 될 명소도 많고 인증샷 찍어서 주위에 자랑하고 싶은 곳도 있었을 법하다. 은영씨는 일본라면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과감히 버렸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우며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일본에서 이어진 행선지는 유럽. 런던을 거쳐 파리로 갔다. 파리에 간 이유도 지극히 단순했다. '바게트 빵을 먹고 싶다'는 큰 아이의 소망 때문이었다. 우선 큰 아이의 소원대로 파리의 한 빵집에서 갓 구워나온 말랑말랑한 바게트빵을 원없이 먹은 뒤, 에펠탑이며 몽마르뜨 언덕을 구경했다.
"아이들이 어려서인지, 해외명소에 가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은 역시 놀이터나 공원이었어요. 어딜가나 놀이터는 꼭 있잖아요. 어느 날은 하루 반나절 이상은 그냥 놀이터에서 놀기만 한 적도 있었죠.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 아이들과 함께 손짓발짓 해가면서 함께 놀았던 추억이 제일 기억에 남나봐요. 놀이터에서 우연히 현지인 엄마를 만났는데 그 엄마의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었어요. 우리 애가 '엄마 얘네 외할아버지가 한국인이래'라면서 무척 반가워했어요. 이를테면 이렇게 여행지에서 만난 그런 우연들, 예상치 않았던 상황이 에펠탑이나 몽마르뜨보다 더 기억난다고 해요"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런던에서는 고약한 한인 민박 주인을 만나는 바람에 큰 아이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주위 여행객들의 말만 듣고, 큰 아이가 억울한 일을 당했던 것. 나중에 진실은 밝혀졌지만 큰 아이의 상심은 컸다. 은영씨는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아이들과 함께 묵을 숙소를 직접 찾아다녔다. 아이들과 지도를 보고, 일일이 방문해서 점검하고 그리고 역시 최종 상의를 거친 끝에 숙소를 정했다. 숙소에 들어왔을 때는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었다. 다른 일정을 취소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숙소 찾느라 너무 고생했지만 한 가지 알게 된 사실도 있죠. 런던은 주소체계가 무척 잘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 그때 고생한 덕에 런던의 지도만 보고 장소를 찾을 수 있어요."세상에 공짜는 없다. 발품 팔아서 다닌 여행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여행을 다니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여행 한 번 다녀왔다해서 아이들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 조금씩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감이 붙었다. 낯선 환경에 던져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을 대하는 법도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하고 공공예절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웠다. 돈이 부족하면 어떻게 아끼고 절약해야 하는지도 요령껏 터득했다.
미국에서 숙박비 60만 원 절약하며 선택한 '기차역 노숙'"미국에서 저희는 노숙도 했어요.""네에? 어쩌다가요?""물가가 장난 아니잖아요. 숙박비가 1박에 60만 원 하더라구요. 너무 비싸잖아요. 그래서 애들한테 물어봤죠, 편안하고 안전한 하룻밤을 택하는 대신 우리는 6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어떡할래?""그래서 아이들이 뭐라 했어요?""그냥 '여기서' 자자고 하더라구요." "춥고 무서웠을 텐데요.""남자애들이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죠.""잘 만하던가요?""다음날 죽는 줄 알았죠.(웃음)"그날 은영씨네는 기차역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대신 60만 원은 벌었다. 노숙을 했던 경험도 여행의 일부였다. 몸으로 배우는 낯선 공부였다. 여행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