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땅부자' 나무올시다

1만2046㎡(약 3650평) 소유한 경북 예천의 황목근(黃木根)

등록 2011.06.03 11:39수정 2011.06.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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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목근의 배경

황목근의 배경 ⓒ 정만진


횡(橫)은 '합종연횡'이란 고사성어 덕분에 유명해진 한자 글자이다. '횡'자의 대표적 의미는 '가로'. 따라서 한자어 '종횡'은 우리말 '가로세로'이다.

한자가 뜻글자이므로 '횡' 역시, '가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이게 웬 횡재냐!" 할 때의 횡(橫)자가 '가로'를 뜻한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가로(로 생긴) 재물'? '세로로 생긴 재물'은 노력하여 얻은 것이고, '가로로 생긴 재물'은 길에서 그냥 주은 것이다? 그런 식의 유추는 설득력이 없다.

'횡재'의 '횡'은 '뜻밖의, 갑자기'를 뜻한다. 뜻하지 않게 얻은 재물이 횡재인 것이다. 우리 속담 중에는 '도랑 치다 금 주웠다'거나 '하늘이 내린 복' 등이 횡재한 사람의 심리를 잘 나타내준다.

노력해서 돈을 버는 데 기쁨을 느끼는 이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돈을 벌었을 때 더 기뻐한다. 이런 이는 그저 '공짜'를 좋아하는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부정부패가 아닌 바에야 그런 이를 탓할 수는 없다.

a  황목근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황목근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 정만진


길을 가다가 뜻밖의 볼거리와 마주쳤을 때의 기쁨, 이것은 여행의 참맛을 진정으로 깨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여유다. 계획한 방문지에서 대상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이야 노력하여 돈을 번 것과 같으니 응당 누려야 할 당연지사이지만, 우연히 눈부신 절경이나 역사유적과 조우하는 것은 말 그대로 횡재를 하는 호사이기 때문이다.

일이 있어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관내를 지나가다가 뜻밖의 횡재를 했다. 면의 이름이 '용궁'이라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 불로소득이었다. 도로변에서 '황목근 900m'라 적힌 갈색 이정표를 보고 호기심을 작동한 것이 소득의 원천이었다.

a  황목근

황목근 ⓒ 정만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696번지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땅부자' 나무 황목근(黃木根)이 들판 한복판에 떡 버티고 있다. 높이가 12.7m에 이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5.65m나 되는 거대한 고목 팽나무이다이다. 수령 500년 추정.

물론 이 팽나무는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있다. 50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마을 들머리에 서서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지나가던 아이가 논밭 일을 도맡아 하는 어른이 되고, 이윽고 꼬부랑 백발 노인네가 되었다가 죽고, 다시 그 자손이 같은 식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것을 바라보는... 세대(世代)의 순환을 대략 20여 회나 겪었으니 동민들이 경외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a  500년 동안 마을사람들과 함께 비바람을 맞아온 나무는 언제부턴가 동민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이 되었다.

500년 동안 마을사람들과 함께 비바람을 맞아온 나무는 언제부턴가 동민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이 되었다. ⓒ 정만진


그래서 동민들은 1939년 마을 공동 소유의 토지 1만2046㎡(약 3650평)를 이 동신목(洞神木) 앞으로 등기 이전하였다. 마을의 수호신인 이 팽나무를 그저 나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민으로 여긴다는 인간적 인식의 발로였다. 그리고 나무에 성명도 부여했다. 5월이면 나무 전체에 누런 꽃이 핀다고 하여 성씨는 황(黃)으로 정했고, 이름은 근본 있는 나무라는 뜻에서 목근(木根)이라 했다.

1998년 12월 23일, 이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400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땅부자' 나무이고, 수령 50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조상 대대로 마을사람들의 애정과 보호 속에 자라오면서 동신목으로서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왔고, 나무를 사람처럼 생각하는 순박하고 따뜻한 이곳 사람들의 독특한 인간미를 인정한 결과였다.

이 나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삼강주막이 있다. 낙동강 1300리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날식 주막이다. 물론 주막 바로옆에 붙은 국도를 지나면서 그곳을 아니 들를 수는 없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건대, 삼강주막보다도 이 황목근이 더 진득하게 사람의 마음을 적셔주는 문화유산이 아닐까. 나무조차도 사람처럼 대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자연친화적 인식이 깃들어 있는 나무이니, 비록 삼강주막의 술잔 위에 달이 뜬다 한들 이보다 더 인간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 하루, 황목근과 조우한 기쁨은 더할 나위 없는 추억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팽나무 전체를 뒤덮는 황색 꽃을 보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팽나무의 이름이 황목근으로 정해진 연유가 바로 그 꽃사태인데, 화룡점정의 찰나를 얻지 못한 것이다. 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공들여 찾아온 것도 아니면서, 횡재로 뜻밖의 천연기념물 고목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으면서 너무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리라. 내년 5월을 굳게 기약하면서, 이제는 그만 신목이 지켜주는 마을 앞을 떠나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든다'는 금언이 서글픈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바로가 아니라 삼강주막에는 잠깐이라도 들렀다가 가야 하리.

a  황목근

황목근 ⓒ 정만진

#황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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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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