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관두길 잘했다, 느끼는 순간

[초보 아빠의 좌충우돌 육아일기 ⑪] 백수가 된 아빠와의 동거

등록 2011.06.10 09:26수정 2011.06.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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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작은 똥 기저귀와 함께


아빠와 컴퓨터를 다정한 부녀
아빠와 컴퓨터를다정한 부녀정가람

3월 첫째 주, 5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에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어쨌든 난 달리 갈 곳도 알아보지 않은 채 무작정 회사를 그만 두었고, 퇴직금이 다하는 날까지 몇 달 동안 집에서 쉬기로 했다.

다행히 아내는 나의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신 내게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빠와 남편 노릇을 부탁했는데, 이야기인즉슨 함께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일찍 시작하고 늦게 끝나는 물류업의 특성 때문에, 혹은 집에서부터 1시간이 훌쩍 넘는 회사까지의 거리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과의 시간을 늘려달라는 아내의 요청이었다.

아산 휴양림에서 여행을 가도 아빠와 함께
아산 휴양림에서여행을 가도 아빠와 함께정가람
백수가 된 남편의 입장으로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흔쾌히 알았다고 답해야만 했다. 생각 같아선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이번 기회에 쉬면서 나의 장래에 대해 더 고민하고, 공부도 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집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보다 보면 결국 그 모든 것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게 내 업보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 모든 걸 극복하고 답을 구하게 되면 더 절실하겠지.

덕분에 나의 하루는 아이의 똥 냄새와 함께 시작됐다. 평소 새벽에 출근하기 위해 일찍 잠을 청해야 했던 난 회사를 그만둔 뒤 밤 늦게 잠을 청하고 아침 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오지 못했는데(아이가 자는 그 시간만이 우리의 자유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놀던 아이는 아침 10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똥을 쌌고, 나는 그 냄새에 기저귀를 갈기 위해 눈을 떠야만 했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에게 차마 아이의 똥 기저귀를 갈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문제는 비몽사몽 아이의 똥 기저귀를 갈고 난 뒤 시작되었다. 아이는 똥을 싸고 난 뒤에 꼭 배고프다고 징징거렸는데 그게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요리의 '요'자도 싫어하는 내가 아침밥을 하자니 너무도 막막하고, 그렇다고 밤 늦게까지 작업하다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우자니 너무 미안하고.

처음에는 아내가 조언한 대로 우유에 시리얼을 타서 아이에게 먹였지만, 그것도 며칠이었다. 아이는 이내 밥을 달라고 울어댔고 결국 만삭의 아내가 힘들게 일어나 아침밥을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보기 안쓰러웠지만, 두 눈 질끈 감고 외면했다.


못 하는 것도 못 하는 거지만 요리 자체가 워낙 싫었던 탓이었다. 대신 난 아내에게 집에 있는 동안에는 집안 일에 최선을 다하겠노라며 다시 한 번 약속하였고, 아무리 귀찮은 일이라도 아내의 요청만 있으면 기꺼이 나섰다. 요리 하나만 빼고.

신뢰의 형성

스마트폰의 위력 그 모든 것의 시작일 수도
스마트폰의 위력그 모든 것의 시작일 수도정가람

아이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백수가 되고 난 뒤 가장 크게 바뀐 나의 일상은 아이와의 관계였다. 평소 주말을 제외하고는 하루 2시간도 보지 못하던 아빠가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으니 아이와의 관계가 달라질 수밖에.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과 노트북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그전보다 훨씬 덜 아내에게 매달렸고, 그것만으로도 아내는 한시름 놓았다. 그나마 백수 남편이 한 건 해주는 천만 다행인 순간.

아내는 아이들이 일정 개월 수가 되면 아빠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퇴근하면서 사오는 아이스크림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마와 같이 노는 것과 아빠와 같이 노는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아이를 안아 올리더라도 엄마는 겨우겨우 안아 올리지만 아빠는 쉽게 번쩍 들어올리니 아빠랑 노는 게 더 자극적이라는 말이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인 듯했다. 당장 나의 기억을 들춰봐도 어린 내가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렸던 건 당신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보다 아버지와 이불 위에서 벌이던 거친(?) 몸싸움 때문이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동생과 나를 뒤로 안아 돌리며 '독사려'를 외칠 때 느끼던 그 짜릿함. 아마 내 아이도 그 자극이 좋아 내게 매달리는 것일 테지.

신뢰의 형성 아빠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린다
신뢰의 형성아빠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린다정가람

뽀뽀 표현이 적극적으로 되어가는 아이
뽀뽀표현이 적극적으로 되어가는 아이정가람

게다가 이와 같은 몸싸움은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신뢰를 형성한다고도 했다. 아이와 하는 대부분의 놀이는 아이를 들었다 놓는 것이 기본 동작인데 아이는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부모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나를 하늘 높이 올려도 절대 그냥 땅에다 내려 꽂을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아마도 이때 형성된 부모와의 유대감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관계가 돈독해지니 아이의 표현도 적극적이 되었다.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 아빠가 옆에서 자고 있는지부터 확인했고, 내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이불을 덮고 있으면 바로 그 옆에서 내 베개를 함께 베고 내 눈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괴성을 지르며 뛸 듯이 기뻐하는 아이.

그리도 좋을까. 이젠 웬만한 자극이 와도 무덤덤하게 넘기는 나로서는 이런 사소한 것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아이가 부러울 뿐이었다. 우리도 그런 동심의 시절이 있었는데.

밝은 햇살에 눈을 뜨면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딸래미가 말똥말똥 아빠의 눈길을 기다리는 아침. 아마도 이것이 혹자들이 말하는, 그리고 내가 잊고 있었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리라. 아침에 일어나 뭐라고 옹알거리며 매달리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래도 회사 그만두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신의 계절

아빠와 함께 간 문화센터 이젠 낯설지 않습니다
아빠와 함께 간 문화센터이젠 낯설지 않습니다정가람

한 달이 넘도록 함께 하다 보니 이제는 아빠의 존재가 익숙해졌는지, 엄마가 함께 하지 않아도 별로 개의치 않는 아이. 난 만삭의 아내를 대신해 격주로 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를 다녔는데 1시간이 넘도록 엄마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아무렇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백수 신분이 들통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아이가 그리 담담하니 아내에게는 문화센터를 가지 못하겠다 발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4월 중순이 넘어가자 아이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아빠가 사라지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조건 엄마에게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었다. 밥도 엄마가 먹여야 되고, 기저귀도 엄마가 갈아줘야 하며, 씻어도 엄마, 자는 것도 엄마와 함께 해야만 했다. 아빠가 대신 해주겠다며 손을 내밀면 막무가내 울어버리는 18개월 된 아이.

말을 못하니 녀석의 심정을 들어볼 수는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녀석도 눈치챈 것이다. 엄마는 이제 곧 태어날 아이의 몫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걸까? 녀석은 좀 떼는 듯 싶었던 젖을 다시 빨기 시작했고, 덕분에 아내는 더 힘들어 했다. 무서운 녀석 같으니. 우리가 처음 둘째 임신을 의심한 것도 녀석이 갑자기 아빠하고 친한 척을 해서인데, 그런 녀석이 아내의 출산을 모를 리 없지.

개구쟁이 까꿍이 불러도 오지 않고 저리 말을 듣지 않는다
개구쟁이 까꿍이불러도 오지 않고 저리 말을 듣지 않는다정가람

덕분에 난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아예 매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안 된다고 했을 때나 거들떠 보는 꿩 대신 닭이 되고 만 것이다. 덕분에 몸은 편해졌지만 밀려오는 이 씁쓸함은 무얼까?

여하튼, 백수가 되고 나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까꿍이의 아빠에 대한 신뢰인 듯싶다.

아빠 따라하기 같이 뒷짐을 져본다
아빠 따라하기같이 뒷짐을 져본다정가람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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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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