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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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1879~1910)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그는 현감 출신의 유명한 자선사업가인 안인수의 손자인 동시에 진사 출신의 지식인인 안태훈의 아들이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이 가문은 1906년 3월 평안도 진남포(지금의 남포직할시)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양옥을 구입하고 삼흥학교·돈의학교를 건립할 정도로 매우 부유했다. 이 무렵 안중근은 평양에서 광산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즐기고 좀더 커서는 총을 좋아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상류층 자제들과 달랐지만, 안중근은 경제력과 지위와 명예를 모두 갖춘 양반가문의 아들이었다. 이런 프로필을 보면, 그가 특권층 출신의 애국운동가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평소에 황해도 해주 땅에서 김구와 안중근이 만났다면, 그 장면이 어땠을까? 김구가 세 살 많기는 하지만, 나이란 것은 본래 동일한 신분 안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황해도에서 손꼽히는 양반가문의 자제인 안중근 앞에서는 김구뿐만 아니라 김구의 할아버지라도 일단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조선왕조가 평화롭게 굴러갔다면, 김구와 안중근의 관계는 평생토록 그러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운명을 갖고 태어난 두 사람은 구한말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상호 적대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김구는 서민 중심의 사회개혁운동인 동학농민전쟁(1894)에 참여했고,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하는 민병대 활동에 참여했다. 김구와 안중근이 '친(親)서민 대 반(反)서민'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들은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적극적 주모자'로 활약했다. 19세의 김구는 동학교주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책임자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16세의 안중근은 민병대장인 아버지 밑에서 정찰특공대를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10대들이 어떻게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10대 후반은 오늘날의 20대 후반에 맞먹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거기에다가 김구의 경우에는 리더십(조직력·언변·친화력)과 함께 열정이 출중했고, 안중근의 경우에도 리더십(양반신분·전투력 등)과 함께 열정이 탁월했다.
또 평시와 달리 격변기가 되면 나이·경제력·지위·학력 같은 요소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전쟁 당시에는 두 청년이 조직을 이끈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동학전쟁 중 전투 현장에서 충돌할 뻔했던 김구와 안중근흥미로운 것은, 서두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동학전쟁 중에 동일한 전투 현장에서 충돌할 뻔했다는 사실이다. 김구가 이끄는 동학군 부대가 해주 서쪽의 회학동에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8킬로미터 떨어진 청계동에서는 안태훈·안중근의 민병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김구와 안중근이 가까운 거리에서 상호 대치했던 것이다.
만약 양측이 그대로 충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시한 적은 상대도 하지 않고 굵직한 적장만 골라서 저격하는 안중근. 두 부대가 격돌했다면 안중근의 사격 솜씨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양측의 충돌은 뜻밖의 방법으로 '무산'되었다. 민병대장 안태훈이 밀사를 보내 비밀 협정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부대와 김구의 부대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백범일지> 상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