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을 빈 깡통처럼 굴러다녔다

시인 송유미 두 번째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 펴내

등록 2011.07.14 15:44수정 2011.07.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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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인 송유미 시인 송유미가 두 번째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푸른사상)를 펴냈다

시인 송유미 시인 송유미가 두 번째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푸른사상)를 펴냈다 ⓒ 송유미

"철거가 시작되자 포클레인 한 대가 집들을 과자처럼 부수어 먹기 시작한다 그는 용달차 기사 옆자리에 올라타는 나를 향해 나뭇잎의 파란 손을 오래오래 흔든다 // 비가 오면 나는 벌목의 피비린내 가득한 그 곳을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닌다" -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 몇 토막

'살찐 슬픔'! 참으로 독특한 표현이다. 이 시어에 담긴 뜻을 제대로 짚어내기 위해서는 반대말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 반대말은 '깡마른 기쁨'이다. 그렇다면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는 '깡마른 기쁨으로 돌아다니다'라고 읽을 수가 있다. 이 말은 곧 '기쁨', 새로운 삶을 줍기 위해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시인 송유미. 그는 독특한 눈을 심장에 박아 독특한 시어로 시를 마음껏 다룰 줄 아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시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지닌 '한창 어긋남'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에게 입히는 깊은 상처를 나만이 지닌 생각으로, 나만이 나아가고자 하는 세상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에게 있어 과거나 현재, 미래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이나 기다림, 한, 고독, 버려짐 등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몸이다. '살찐 슬픔'이나 '깡마른 기쁨'도 그리움이나 기다림, 한, 고독, 버려짐 등에 안타까운 손짓을 하기도 하고, 서로 등을 돌리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가 된다. 몸과 마음처럼 말이다.      

'상실'이 남긴 '흔적'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끌어당기다

a 시인 송유미 이 시집은 ‘상실’을 노래하면서도 그 ‘상실’이 남긴 ‘흔적’을 딛고 새로운 ‘삶’을 끌어당긴다

시인 송유미 이 시집은 ‘상실’을 노래하면서도 그 ‘상실’이 남긴 ‘흔적’을 딛고 새로운 ‘삶’을 끌어당긴다 ⓒ 푸른사상

"내가 절실한 만큼 다가왔다가 무심한 만큼 멀어지는 '유클리드'(BC 300년께 활약한 그리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의 길 위에서 더 많은 바람의 길을, 구름의 길을, 나무의 길을, 싱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가물거리는 촛불 하나 내 목숨처럼 타오르고 있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송유미가 두 번째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푸른사상)를 펴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첫 시집 <백파를 찾아라>를 펴낸 뒤 11년 만에 펴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상실'을 노래하면서도 그 '상실'이 남긴 '흔적'을 딛고 새로운 '삶'을 끌어당긴다. 그가 쓰는 시 곳곳에 '환상+사실'이 서로 씨실과 날실로 맞물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집은 모두 3부에 59편이 그야말로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비, 경계선을 핥다, 어느 별에서 온 풀씨, 시인의 우물, 그물에 걸린 바람처럼, 햇빛을 앙물고 난다, 아버지의 못, 보리밥 바구니, 헌 군화 속에 아버지 꽃 피다, 빈 주머니에게 안부 묻다, 운주사 머슴 부처, 비눗물 떨어지는 단어를 찾다, 된장찌개 속에 넣어서 끓인 말 등이 그것.

시인이 말하는 '살찐 슬픔'에는 두 가지 뜻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하나는 이 세상이 심은 슬픔이 너무 깊게 파고들어 살이 물집처럼 부풀어 오를 정도로 아프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시인이 살아가는 이 사회, 이 사회를 주름 잡고 있는 물질자본과 무차별 개발주의 때문에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많은 헛살이 디룩디룩 찌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 송유미는 시 '뿌리'에서 "물질주의 뿌리가 없이는 가난한 민초의 생은 / 부평초의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쓴다. 그는 "가능한 그 뿌리(물질주의)를 융성하게 번식시켜야 하고 / 그 뿌리를 잃지 않아야 이 세상에다 쾅쾅 / 내 목소리의 뿌리 내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끝까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남자의 우물은 내 거울이 되었다


콜라병 속에 새 한 마리 살고 있다


그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제대로 닦을 수 없다
몇 수십 개의 빌딩이 콜라병 속에서 흔들리는 도심
그가 자동 회전문을 밀대로 등사기처럼 북북 밀면
크게 하늘이 확대되어 무수한 사람들이 날아오른다

굴러 굴러다니는 콜라병 속으로
키 작은 가로수들 걸어 들어가는 오후 세 시

조심조심 콜라병 속에서 그가
유리 속의 감옥을 빛나게 닦고 있다
그의 새털 같이 많은 날들, 그 어디에도
텅 빈 허공의 바닥을 닦지 않는 날이 없었다

무심코 뒤통수에서 돌이 날아와
그 등에 가득 찍히는 발자국들
푸득푸득 새처럼 날아오른다

- '콜라병 속의 새 한 마리 산다-유리 닦는 클라인 씨' 모두

시인 송유미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제대로 닦을 수 없"는 낮 3시에 바라보는 도심을 콜라병에 빗댄다. 콜라병에 든 콜라처럼 점점 어둠으로 향하는 그 시간에 유리를 닦고 있는 한 남자. "유리 속의 감옥을 빛나게 닦고 있"는 그 남자는 "새털 같이 많은 날들" 동안 "텅 빈 허공의 바닥"인 유리를 닦고 또 닦았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언뜻 바라보면 마치 허공을 나는 한 마리 새처럼 날렵하게 보이지만 그 남자에게 있어서는 아주 위태롭고 위험한 순간이다. "콜라병 속의 새 한 마리"인 그 남자 클라인 씨, 그는 어쩌면 식의주에 얽매여 주어진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텅 빈 허공의 바닥"을 죽어라 닦고 있는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송유미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끝없는 '떠돎'과 '흔들림'으로 가득하다. 대구 동화사, 충북 진천 길상사, 조치원, 서울 왕십리, 전라도 곰소항, 호미곶 등. 시인은 그 '떠돎'과 '흔들림'을 따라 뒹굴기도 하고, 그 사이에 서기도 하고,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기도 한다. 그 '떠돎'과 '흔들림'은 때때로 시인에게 다가와 그대로 시가 된다.

"나는 빈 깡통처럼 굴러다녔다…. 오, 저 밑바닥까지 굴려 내려가 몸 안 가득 괴어오는 탱탱 울음 하나, 콸콸 쏟아낼 수 있다면"(깡통 씨의 진화론)이나 "탈출을 꿈꾸는 빨랫줄에 널린 갖가지 꿈의 의상들"(햇빛을 앙물고 난다), "신발 속에 살던 그 많은 사람 어디 가고 신발들만 걸어서 어딜 가나요"(꽃신), "땅을 쳇바퀴처럼 굴려도 보고 얼싸얼싸 곱사춤 추며 먼 길을 떠나는 등짐꾼이 되고 싶다"(산팔자 물팔자-바우덕이에게) 등이 그러하다. 

길상사 겨울나무 속으로 들어간다는 그 남자의 편지

나는 그 편지를 품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겨울나무는 출렁출렁 우물로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집들이 넘치고 도시가 넘치는 그 남자의 겨울나무 나는 그의 우물 속으로 깊이깊이 걸어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의 우물이 내 가슴에도 고여 왔다…. 그 남자의 눈빛은 점점 투명한 우물이 되었다 그 남자의 우물 속, 그가 보았다는 겨울나무의 우물이 내 마음의 우물을 팠다 이심전심 그림자처럼 그 남자의 우물은 내 거울이 되었다 - '나무의 우물' 몇 토막

송유미 시인에게 있어서 '우물'은 앞 생이자 지금 생이며 다가올 새로운 생이다. 이 시집 곳곳에 자주 나오는 '우물'은 시인 자화상이자 이리 설키고 저리 뒤엉켜 있는 이 복잡하고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 자화상이다. 시인은 이 '우물'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추며 나와 우리, 삼라만상을 '살찐 슬픔'으로 품는다.      

'깊은 슬픔' 아닌 '살찐 슬픔'은 또 뭐야?

"봄의 뜻을 찾기 위해 사전을 뒤적인다 '보'와 '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낱말이 숨어 살던지 그 계단 사이에 내가 모르는 말이 이처럼 많이 살아 있다니 말뜻도 모르고 써버리는 말 몰라서 쓰지 않았던 말 봄 하늘로 흰나비 떼처럼 날아오르는 갈기 선 말" - '비눗물 떨어지는 단어를 찾다' 몇 토막

시인 고은은 "사전 속의 말은 죽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 나올 때에만 살아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세상에 나온 말들이 거의 죽은 말이 된다"고 꼬집는다. 그는 "송유미의 비눗물이 떨어지는 낱말이란 무슨 뜻일까. 방금 땟국이 없어진 것인가. 그런데 말의 체제는 말의 무한으로 나아가며 해체된다"라고 되짚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송유미의 '명태'는 인생의 축도(縮圖)"라고 못 박는다. 그는 "'그대가 펼쳐놓은 엉성한 그물망'에 걸리기 이전의 자유로운 행복한 삶과 그 뒤 오복을 빌고자 '젯상'에 올려지거나 '매질'을 당하는 억제된 희생적인 삶의 대비를 통해 우리는 저마다 대체 내 인생의 덫인 '그물망'은 무엇이었을까를 연상하게 된다"고 평했다.

최재봉(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는 "송유미 시의 바탕은 울음이다. 울음으로 시작한 인생, 사랑도 울음이요 문학도 울음"이라며 "그러나 '아프게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난 자리에서 떨어지는 검은 상처의 꽃들'(겨울 단추꽃)을 보라. 시인의 울음은 열매보다 아름답다. 언젠가는 눈물의 바다를 박차고 날아오르기를 꿈꾼다"고 적었다.

시인 송유미는 타고난 무당이다. 그가 펴낸 두 번째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에는 삼세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맞물려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시인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툭툭 때리고 찌르며 손찌검하기도 하고, 끝없는 그리움과 기다림, 한, 고독과 거리낌 없이 포옹하기도 한다. 시인이 이 시집 표제에서 '깊은 슬픔'이라 하지 않고 '살찐 슬픔'이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 송유미는 서울에서 태어나 <심상>과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백파를 찾아라>가 있으며, 제16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 평론가로 뽑혔다.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

송유미 지음,
푸른사상, 2011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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